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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현석의 팔레트] 오발령의 출근길

등록 2023-06-04 18:15수정 2023-06-05 02:36

지난달 31일 아침 6시41분 서울시가 경계경보 발령과 함께 대피 안내 문자를 발송했으나 행안부가 곧이어 오발령이라고 정정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아침 6시41분 서울시가 경계경보 발령과 함께 대피 안내 문자를 발송했으나 행안부가 곧이어 오발령이라고 정정했다. 연합뉴스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2016, 문학실험실)은 사람이 죽고서 넋이 구천을 떠도는 49일간의 중음(中陰) 상태를 마흔아홉개의 시편으로 형상화한다. 그중 첫번째 시 ‘출근’은 죽는 순간을 그린다.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그렇게 한 여자가 지하철에서 쓰러지면서 역사로 튕겨 나온다. 곁에 있던 늙은 남자가 쓰러진 여자를 추행하고 가방을 훔친다. 뒤이어 다가온 중학생 소년들은 쓰러진 여자의 주머니를 뒤진다. 그사이 여자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공중으로 떠오른다. 제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바라보던 넋이 육신을 등진다. 마치 그림자와 멀어지는 새처럼 여자가 말없이 걷는다. 영혼은 몸을 내버려 둔 채 직장으로 향한다. 가던 길을 계속 가는 넋이 다음과 같이 읊조리면서 시는 매조진다.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간다.’

지난 5월31일 오전 6시41분. 서울특별시가 보낸 경계경보 알람에 눈을 떴다. 메시지에는 대피를 해야 하는 이유도, 고지대나 저지대 혹은 지하처럼 대피할 장소도 누락되어 있었다. 후속 안내 없이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말만 덩그러니 담긴 메시지에 사색이 되어 창문을 여니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실제 상황이라는 방송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주요 포털 사이트와 국민재난안전포털도 접속이 되지 않았다. 실제 상황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단서를 무엇 하나 찾지 못한 상황에서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텔레비전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커다란 쇼핑백에 참치 캔과 라면, 햇반, 생수 따위를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손에 먼저 잡힌 옷을 걸쳐 입은 나는 떡 진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채 쇼핑백을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만리재 인근에서 출발해 동대문 방면에 있는 여자친구 집으로 가기 위해 충정로를 지나는 길에 또 긴급안내 메시지가 왔다. “[행정안전부] 06:41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 경계경보가 울린 지 22분이 지나서였다. 황당함과 안도감에 맥이 빠진 채로 다시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침이나 같이 먹자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몇분 뒤, 광화문 사거리에서 멈춰 신호를 기다리는데 앞서 인용한 김혜순의 시가 문득 떠올랐다. 네 군데의 횡단보도 교통섬에는 모두 이른 출근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절체절명일지도 모를 순간에도 여기까지 왔을 사람들을 보니 시의 언어가 더없이 적절해 보였다. ‘살지 않을 생을 향해 가는 길’일지 모르는데도 ‘지각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던 마음들이 사위에 무리 지어 있었으니까.

장시간 노동이 다양한 형태로 건강에 미치는 해악이 입증된 이래,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프면 쉴 권리,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은 이에 대한 여집합이다. 불안정과 유동성을 상수로 둔 시장 논리와 무한 경쟁이 일상인 사회에서 서울시가 천만 시민을 상대로 ‘기적의 아침’을 위한 모닝콜을 시전했다는 우스개가 마냥 우습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여자친구가 미리 만들어둔 스크램블드에그를 같이 먹었다. 간단히 씻고 다시 집을 나서야 했는데, 당연하게도 우리 둘 다 출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속 깊이까지 울리는 제법 묵직한 헛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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