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주간지 편집부의 일과 삶을 다룬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한겨레 프리즘] 최원형 | 책지성팀장
‘물건을 만든다’는 뜻의 일본어 ‘모노즈쿠리’는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말하자면 ‘장인’(匠人)이나 ‘장인정신’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제 꿈은 인쇄가 모노즈쿠리로 인정받는 날을 맞이하는 겁니다.” 일본 작가 안도 유스케는 인쇄 회사 영업사원 우라모토 마나부의 이 말을 중심으로 자신의 장편소설 <책의 엔딩 크레딧>(2022, 북스피어)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흔히 책은 작가가 만드는 것, 좀 더 넓게는 편집자와 출판사가 만드는 것이라 여기지만 우라모토는 “이야기에 ‘책’이라는 몸을 부여하고 어울리는 옷을 입혀서 세상에 내보내는” 인쇄 역시 책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의 대척점에는 자신의 꿈은 모노즈쿠리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맡은 일, 곧 의뢰받은 책을 ‘찍어내는’ 일을 “하루하루 실수 없이 마치는 것”이라 말하는 같은 회사의 ‘톱 세일즈맨’이 있다.
소설은 ‘가라앉는 배’와 같은 처지에 놓인 단행본 출판시장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하는 다양한 출판업계 사람들의 분투를 보여준다. 인쇄기 가동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발품을 파는 인쇄 영업자, 그날그날 환경에 따라 미묘한 설정까지 신경 쓰는 인쇄 기술자, 책 읽는 것이 좋은 나머지 미인쇄 원고를 읽을 수 있는 자기 일이 천직이라 말하는 조판 담당자, 다양한 방법으로 작가들을 붙잡아 책을 내게 하는 한편 인쇄 회사와 끊임없이 ‘밀당’을 벌이는 편집자 등. 전자책 출판에 대한 시장의 요구, 인쇄기를 줄이는 회사의 결정 등 쉬지 않고 밀어닥치는 위기 속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는 것은 이들 모두가 결국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라앉는 배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뿐이다. 침몰을 기다리거나, 침몰 전에 탈출하거나, 아니면 침몰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거나.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했던 두 영업사원은 이 지점에서 만난다. 침몰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는 길은, 자기 일을 모노즈쿠리로 만들고 싶다는 미래를 향한 이상과 긍지는 물론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일상의 축적과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원작의 만화출판 영역을 웹툰 영역으로 옮겨 ‘리메이크’한 한국 드라마 <오늘의 웹툰>.
만화 원작의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2016)를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해 만든 드라마 <오늘의 웹툰>을 보다가,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웹툰이 이미 출판만화를 대체했을 뿐 아니라 아예 새로운 시장까지 창출해 낸 우리나라에서 출판사 산하 만화주간지를 플랫폼 기업의 웹툰 서비스로 옮기고 주인공이 편집자가 아닌 웹툰 피디가 되는 등 ‘현지화’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원작 드라마가 갖고 있던 어떤 핵심이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잘 안 팔리던 신인작가의 좋은 작품을 출판사 편집부·영업부뿐 아니라 여러 서점 직원들까지 힘을 모아 잘 팔리는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원작의 초반부 에피소드가 한국판에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인간의 사회학적 본질을 ‘기술’(technique)이란 개념으로 탐구한 리처드 세넷은 “인간의 사고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공정으로서의 기술이 아니라 문화로 구현되는 기술”, 곧 “특정한 생활양식을 수행하는 기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의 고리가 되어 함께 작동한다는 감각, 자기실현이 전체의 실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 등 원작 드라마가 내세웠던 가치들은 인쇄소부터 서점까지 ‘책을 만든다’는 공통된 형식 아래 형성된 기술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문화에 기대고 있다. 만화책을 웹툰으로 바꾼다고 해서, 이를 감싸고 있는 문화까지 자동으로 이식될 순 없다.
책의 판권 면을 펴보면, 눈에 보이는 ‘엔딩 크레딧’ 뒤편에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여 있다. ‘언젠간 가라앉을 것’이라는 피상적인 세간의 전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여전히 책을 ‘만드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이 배의 실체를 보려 할 때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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