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규 21세기 한중교류협회장(왼쪽부터), 박진 외교부 장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임채정 한중관계 미래발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케이크 커팅식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최근에 한 기자와 통화했다. 한-중 수교 30주년 특집 기사로 한국인의 반중정서를 다룬다고 했다. “또, 반중!”이란 탄식이 새어나왔다. 기자도 겸연쩍어했다.
한-중 관계 기사가 복제품처럼 익숙한 논조가 반복되는 상황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한국인 대부분이 중국을 싫어하고 청년들의 반중정서는 특히 심하다는 미국 퓨리서치센터 조사 결과가 전면에 등장하고, 국내 연구자와의 짤막한 인터뷰로 반중을 확증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반중정서는 무시할 수 없지만, 그래 봤자 무수한 사람들이 ‘중국’과 접속하는 풍경 일부이다. 하지만 최근 몇년 한-중 관계 기사의 의무 통과점인 양 반복해서 등장하다 보니 다른 풍경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졌다. 물리적 접촉이 힘든 팬데믹에 지식생산자들의 담론권력이 갖는 무게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얘기를 전했고, 기자도 십분 동의했다. 하지만 기사는 “또, 반중!”이었다. 반중정서를 자극하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퓨리서치조사를 인용하고 “역사·한복·김치공정” 논란을 환기했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언론이 갈등을 부추긴다는 지적을 끝에 살짝 덧붙였다.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열린 각종 행사도 정해진 패턴을 반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국 정상이 축하메시지를 교환하고, 재계 인사들이 만찬을 열고, 높으신 어른들이 대중의 반중정서를 우려했다. 중국학계의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행사도 대동소이했다. 연구자 정체성보다 정부, 기업, 언론과의 친연성이 유독 강한 탓일까. 다른 길을 내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지만, 행사 참여자들은 대체로 정부 관료나 기업가의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정치, 외교, 군사, (노동을 뺀) 경제를 논하고, 끄트머리에 사회문화 세션을 배치했다. 이 세션의 단골 주제는 역시나 ‘반중’이었다.
이런 의례를 보면서 한-중 수교 20주년의 풍경을 떠올렸다. 십년 전 여름, 나는 베이징 근교에서 국내 한 대기업이 후원하는 한·중 대학생들의 봉사활동을 참관했다. 농민공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 자녀가 다니는 소학교가 활동 장소였다. 더운 날씨에 벽화를 그리느라 지친 학생들이 동행한 나한테 고민을 쏟아냈다. 한 한국 학생은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자는 시간까지 죄로 느낄 만큼” 강박감이 심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봉사단에 참가하며 자존감을 회복했지만, 베이징에서의 활동은 “뭉클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에피소드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한 중국 학생은 봉사 장소가 ‘농민공학교’라는 명분으로 전세계 후원을 빨아들인다며 빈곤 산업의 폐해를 지적했고, 쓰촨성에서 온 다른 학생은 자원이 집결된 수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상황을 씁쓸해했다. “봉사하러 베이징에 왔다고 하니 친구가 비웃으며 말했어요. 베이징? 베이징 인민은 널 필요로 하지 않아.”
실존의 결핍을 메우려는 바람에서 제 나라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까지, 대학생들의 고민은 국경에 구속되기도, 국경을 넘어 너른 교감을 만들기도 했다. 활동 마지막 날, 학생들은 베이징에서 대기업이 주최한 한-중 수교 20주년 행사에 동원됐다. 중국 고위급 인사들이 한-중 수교 축하 메시지를 낭독하고, 기업의 전략적 관심 분야인 환경과 에너지 관련 강연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졸음을 참느라 혼났지만, 공익활동 사진전으로, 기념촬영으로, 팀별 발표로 공식의례의 적절한 장식이 돼줬다.
나는 올해 한-중 수교 30주년 행사에서 익숙한 장면을 본다. 지식과 권위를 독점한 사람들이 한-중 관계에 대한 우려와 공치사를 오가며 기성품 같은 의례를 반복한다. 한·중 대학생 봉사활동이 (교류 과정에서 각자가 새로 품은 고민과 열망은 지워진 채) 수교 기념행사의 장식 이미지로 남았듯, 변화무쌍한 교류사가 반중·친중 프레임에, 주류사회의 통행증을 가진 자들이 연출하는 의례에 단단히 격리됐다. 지난 십년 동안, 한국과 중국에서 취약한 삶들은 부딪히기도, 새롭게 교감을 트기도 했다. 노동, 여성, 생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항자들, 몽상가들의 연대도, 불법과 차별의 위험을 감내한 이주자들의 얽힘도 많았다. 혐오와 낙인에 시달리면서도, 한국과 중국을 부지런히 연결하며 생존을 도모한 재중동포 -조선족의 활약도 컸다.
역사는 소수의 꿈, 음지와 경계의 삶에 쉽게 자리를 터주지 않는다. 한-중 수교 30년, 낮은 자리에서 부단히 꿈틀댔던 무명씨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