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2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1930년대는 인류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때의 위기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비극을 겪고 나서야 진정됐다. 그래서 어떤 시대를, 더구나 현시대를 1930년대에 빗대는 것은 상당한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한데 아무래도 2020년대가 1930년대의 재연임을 더는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게다가 단순반복이 아닌 확대판이다. 만인의 눈에 훤히 드러난 대위기만 해도 네가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끝날 줄 모르는 침체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변주돼 이어지고 있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이제 무력시위까지 동반하며 고조된다. 또한 코로나 19 팬데믹이 아직 종식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감염병 발생 소식들이 들려오며, 올여름 세계 곳곳을 덮친 가뭄과 폭우는 기후급변으로 인한 붕괴가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퍼펙트 스톰’이라는 말처럼, 하나만도 벅찬 거대 위기들이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다.
하지만 1930년대의 환기가 이런 충격적인 현실에 절망을 더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어쨌든 그 시대를 넘겼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종말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는 방향으로 극복했다. 그때 그들은 대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극복했던가? ‘정치’를 통해 극복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치를 바꿈으로써 극복했다. 정치를 새롭게 재발명함으로써 위기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었다.
실은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이런 궁지에 몰리리라 예감하며 그다음 시대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바꾸겠다는 이들도 있었고, 혁명을 부르짖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1930년대에 심판의 순간이 닥치자 기존 사회주의 운동의 개혁파든 혁명파든 대다수는 자신이 약속했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기성 의회 구조에 적응하던 개혁파는 의회정치 자체가 흔들리자 당황하기만 했고, 과거의 혁명이 그대로 반복되는 형태로 혁명을 점치던 이들은 파시스트들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난국을 타개한 것은 관성에 갇힌 개혁파, 혁명파 사회주의자 모두 예기치 못했던 실험과 모험이었다. 19세기식 의회정치 게임에 몰두하던 대다수 개혁파와 달리, 소련의 5개년 계획이나 나치 독일의 전쟁 계획을 연상시키는 개입주의 국가를 민주주의와 새롭게 결합하려 한 이들이 역사의 출구를 열었다. 19세기식 혁명은 고사하고 불과 십몇년 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도 반복되지는 못했지만, 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세력균형이나 제도 배열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새 시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193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독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무참히 무너졌다. 그러나 몇년 안 돼 프랑스에서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새로운 대중정치의 실마리를 보여줬고, 미국과 스웨덴에서는 전후 민주주의가 미리 준비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퍼펙트 스톰이 기어코 인류를 포함한 6차 대멸종으로 귀결되거나 소수 생존자의 파시즘 체제만 남는 미래를 피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다시 한번 정치를 새롭게 재발명한 덕분일 것이다. 지금 정치는 한국에서든 다른 어느 나라에서든 구원자이기는커녕 위기를 증폭시키는 노릇만 할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정치를 변화시킴으로써만 우리 시대에도 사회의 다른 모든 부분이 새 시대를 향해 정돈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가장 시급하고 철저한 혁명의 대상은 정치다. 한국의 경우에는 양대 정당이 독점하는 제 6공화국 정치가 그 대상이다. 요즘 침체와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은 이 점을 선명히 되새겨야 한다. 그간 기성 정치 문법에 충실히 적응하라던 충고들이야말로 오늘날 정의당의 참담한 실패를 낳은 원흉이다. 이제라도 진보정당들은 대위기의 시대에 정치를 재발명한다는 과제에 투신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살아남는 길조차 이러한 결단과 실험 안에만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