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빗길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서울 강남역 물난리는 여러모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드러냈다. 특히, 억대를 호가하는 고급 외제차들이 물에 잠겨 꼼짝 못하는 와중에도 저가 오토바이를 질질 끌고 어떻게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 애쓰는 배달노동자의 상반되는 모습은, 그런 모순의 한 극단을 대변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언론에서든 소셜미디어에서든 이런 두 장면이 직접 대비되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지만, 저 배달노동자의 처지를 성토하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컸던 것 같다. 아마도 최근 코로나19를 겪으며 배달노동을 포함한 이른바 ‘필수노동’에 대한 관심이 최근 우리 사회를 크게 뒤흔든 뒤라 그런 게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성토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코로나19 이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주요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여러 국제기구에서 필수노동에 대한 논의가 무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지 2년 반이 됐는데도, 우리 사회에서 필수노동의 현실은 크게 바뀌진 않은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일까?
노동자의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필수노동 논의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크게 두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 첫째, 필수노동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노동의 필수성 여부를 가르는 데 집착해선 안 된다. 필수노동은 그 겉모습과 달리 경제 바깥의 문제다. 보통 보건의료, 돌봄, 운송, 환경미화 등이 필수노동에 포함되는데, 이들은 전시보호시설과 같은 식으로 이해되는 게 적절하다. 후자가 전쟁과 같은 특수상황에서나 그 ‘필수성’이 두드러지듯, 필수노동도 평시엔 그 각별한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재난 상황이 지나면 필수노동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식는 이유다.
반면 경제적으로 보면, 원칙상 모든 노동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의 ‘사적 노동’과 ‘사회적 노동’ 개념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노동은 일차적으로 사적이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 곧 남에게 팔리면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런 구별에 따르면 살인청부업자의 노동도 그 ‘시장’이 작고 은밀하게 형성되어 있을 뿐 사회적인 게 된다. 여기서 필수성의 크기를 따져봐야 얻을 게 많지 않다.
다음으로, 필수노동 논의는 권력과 위계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애초 ‘필수노동’이 문제였던 것은, 필수적이므로 보호돼야 하는데 정작 그것을 행하는 이들은 과도하게 혹사당하고 처우는 너무도 열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처우라는 건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처우를 개선하려면 이 사회 누군가의 처우는 나빠져야 한다. 강남역 물난리 와중에 힘겹게 물을 가르며 뭔가를 배달하려는 이와 외제차를 버리고 어디론가 피신한 이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결국 필수노동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저임금 노동의 문제다.
이렇게 보면, 이른바 필수노동의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것이 된다. 돌파구가 없을까? 스웨덴의 사회학자 롤란드 파울센이 제안하는 ‘텅 빈 노동’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어떤 글에서 그는, 은퇴하면서 ‘지난 14년 동안 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독일의 한 공무원의 사례를 들었는데, 여기서 이 공무원이 14년 동안 자신의 일터에 머물면서 했던 ‘노동’이 텅 빈 노동이다. 이를테면 업무 중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뉴스를 읽고 댓글을 다는 것, 쓸데없이 문서 보관체계를 재구성하는 것 등이 텅 빈 노동의 사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옌센의 ‘가짜 노동’도 비슷한 현상을 고발한다(둘 모두 국내에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이런 통찰에 입각해서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텅 빈, 곧 필수적이지 않은 노동과 일자리가 늘어나 필수-비필수 노동의 구별을 강화하는 것도 같지만, 이른바 필수노동 또한 텅 비어 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공허해지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노동의 일반적인 조건이라면, 차라리 우리가 모두 ‘내 일은 쓸데없어!’라고 선언하는 데서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위 저자들이 공통으로 내놓는 제안이다. 물론 여기선 우리의 필수노동자도 예외가 아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