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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공원으로 광장을 구원할 수 있을까

등록 2022-09-04 18:08수정 2022-09-25 19:58

공원이 된 광장, 새 광화문광장. 사진 조용준(CA조경)
공원이 된 광장, 새 광화문광장. 사진 조용준(CA조경)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입지 조건은 뛰어나지만 그 어떤 상점이 들어와도 망하는 팔자 사나운 건물이 있다. 광장이나 공원 같은 공공공간도 기구한 운명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구조와 형태를 바꾸고 다른 디자인으로 덧칠을 해도 불운한 장소성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퍼싱 스퀘어’도 그런 곳 중 하나다.

1866년 조성된 이 광장은 무려 일곱차례나 옷을 갈아입었다. 현재의 광장 설계는 저명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와 조경가 로리 올린의 1994년 버전이다. 가면 안 된다는 충고를 여러번 들었지만 그럴수록 궁금증이 커져 출장길에 짬을 냈다. 고층 빌딩 사이에 놓인 장방형 광장인데, 주변 가로보다 높아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 형식이 생경하다. 보라색 콘크리트 탑 안에 오렌지색 공이 들어 있고, 같은 색 구형 조각물들이 바닥에도 널려 있다. 짙은 노란색 가벽이 광장을 가로지르고, 진분홍색 원기둥들이 광장과 가로를 경계 짓는다. 카메라를 아무 방향으로 들이대도 작품이 나오는 극강의 사진발.

사진 찍기를 멈추고 광장 앉음벽에 걸터앉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화려한 색채나 강렬한 조형 탓만은 아니었다.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 광장에 나 홀로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활력 넘치는 거리로 둘러싸인 요지에, 세상 어느 곳보다 밝은 캘리포니아산 태양 빛이 쏟아지는 매력적인 장소에 왜 아무도 없는 것인가. 아찔한 현기증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퍼싱 스퀘어가 기피와 소외의 장소로 전락하게 된 건 1950년대 개조 작업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을 넣느라 지면을 주변 가로보다 올리고 높은 담으로 광장을 가둔 게 패착이 된 것. 이리 바꾸고 저리 고쳐도 공포와 배제의 장소성을 지울 수 없었다. 2016년, 여덟번째 리노베이션이 시작됐다. 높게 올린 지면을 낮춰 광장과 주변 지역 연결성을 회복하고 녹지공간으로 변신을 꾀하는 설계공모가 진행됐다. 당선작의 해법은 단순하다. 적당한 양의 수목과 넓은 잔디밭만으로 공간을 구성해 풍성한 녹음과 탁 트인 시야를 확보한 게 전부다. 예산 문제로 이 공원 같은 광장이 실현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광장의 공원화 사례로 뉴욕 ‘제이컵 재비츠 광장’도 빼놓을 수 없다. 50년간 다섯번 바뀐 이 광장은 리처드 세라의 문제작 ‘기울어진 호’가 설치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내후성 강판으로 만든 길이 37m, 높이 4m 조각이 광장을 가로지르며 시선과 동선을 차단했다. 억압의 감정을 일으킨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법원이 시민들의 철거 요구를 받아들여 당대의 실험작은 8년 만에 해체됐다. 조경가 마사 슈워츠가 포스트모던한 디자인의 벤치와 플랜터(식물 재배 용기)로 광장의 활성화를 꾀했지만 역시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공은 다시 조경가 마이클 반 발켄버그에게 넘어갔고, 해체와 철거를 거듭한 기구한 광장에는 이제 봉긋한 둔덕과 화사한 목련나무 가득한 공원이 들어섰다. 공원이 광장을 살릴 수 있을까.

지난해에는 안 이달고 파리시장이 샹젤리제 거리를 ‘특별한 정원’으로 개조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드골 광장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길이 2㎞, 너비 70m 가로를 2030년까지 넓은 녹지대와 풍성한 숲 터널로 고쳐 도시 산책자의 낙원이 되게 한다는 구상이다. 팬데믹 이후의 도시가 가야 할 방향으로 녹색공간을 강조하는 지금, 샹젤리제 계획은 뉴노멀 도시의 모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경계의 시선도 필요하다. 공원이라는 낭만적 브랜드를 앞세운 계획들이 자연의 외피만 흉내 내며 졸속의 장식으로 치달은 선례를 숱하게 목격하지 않았던가.

공원으로 광장을 구원할 수 있을까. 사진 조용준(CA조경)
공원으로 광장을 구원할 수 있을까. 사진 조용준(CA조경)

왜 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소통과 토론을 건너뛴 채 직진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가 지난 8월 초 일단락됐다. 서울시 보도자료 머리글은 “녹지 면적 3.3배로 늘어난 ‘공원 품은 광장’”이다. 광장의 4분의 1을 녹지로 채웠고, 자연과 녹음이 풍부한 편안한 쉼터에서 일상의 멋과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5천그루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역사성 회복과 접근성 향상을 명분 삼아 시작된 공간 정치 프로젝트가 공원으로 귀결된 셈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는 시민들, 바닥분수에서 첨벙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모습이 반갑지만, 여러 생각이 맴돈다. 근현대사의 파편이 흩어져 쌓인 혼돈의 장소를 낭만의 광화문‘공원’으로 교정할 수 있을까. 공원으로 광장을 구원할 수 있을까.

광화문‘공원’ 바닥분수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사진 조용준(CA조경)
광화문‘공원’ 바닥분수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 사진 조용준(CA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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