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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0대 정치인들의 무훈을 바라며

등록 2022-09-22 19:04수정 2022-09-23 02:40

개빈 뉴섬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지난달 24일 홈리스들을 위한 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EPA 연합뉴스
개빈 뉴섬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지난달 24일 홈리스들을 위한 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EPA 연합뉴스

[세상읽기]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지난여름 한 잡지사와 인터뷰할 때였다. 다시 태어나면 어느 시대,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고 싶은지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한가지 선명한 바람은 지구의 아름다움을 전쟁 없는 곳에서 좀 더 누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만, 여자로만 50년을 살았기에 한국인 여자를 골랐다. 가능한 시대는 1950년대 말뿐이었다. 공부도 하고 싶어 교육열이 높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겠다 했다. 스무살까지 부침 없이 살 만한 조건을 택했다. (이런, 압구정동 배밭 주인집 장남으로 태어나겠다고 해야 했나!)

그런데, 한두마디 답할수록 불편한 사실들이 밀려들었다. 유신시대에 대학에 다닐 거고, 중도에 떠밀려 시집갈 수도 있겠구나, 이름 대신 ‘미스 안’ ‘안양’으로 불리는 20대를 보내겠구나…. 기후위기라는 시한폭탄, 산불, 태풍, 질긴 열대야는 없더라도 다른 현타가 왔다. 지금은 청년 여성들의 저항 덕에 나이 든 나까지 무임승차한 교정된 일상의 기준이 있는데, 그때라면 봉변과 멸시를 모면하고 살아남을 확률이 확 떨어지겠다 싶었다. 대답은 꼬였고 급기야 ‘내 뜻대로 살려면 출가해야겠네요’ 어물쩍 마무리짓고 말았다. 기후위기 못지않게 두려운 현실이 ‘존엄을 잃는 상태’라는 것을 확실히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은 어떤 집에 태어나는가에 달려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에서 3만5천달러로 뛰었지만, 들어가면 꼼짝없이 갇히는 뒤웅박 신세의 세습은 더욱 강화됐다. 개인의 존엄도 이 속에서 뭉개진다. 이제는 태풍보다 하나로마트에 진열된 1만9700원짜리 배추 한포기가 더 무섭다. 재난 넘어 닥쳐올 밥상의 불평등이 더 길고 서러운 시간이기에.

기후위기와 존엄을 무너뜨리는 불평등은 한 몸이다. 정부는 둘을 따로 보기에, 기후위기에 맞선다면서 긴축재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복지를 줄여 기후위기에서 고통받이로 내몰릴 약자들을 단련시키려는 고난 체험은 아니겠지.

지난 9월1일 캘리포니아주의회는 5년간 기후정책에 540억달러(약 75조원)를 쓰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45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멈춘다는 결의로, 언론은 54살 주지사 개빈 뉴섬이 로비해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보도했다. 2035년부터 새로 만든 내연자동차를 팔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기차 사라는 홍보라면 뉴섬은 11월 재선에서 떨어지겠지만, 이 정책은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강화하는 동시에 취약계층을 구제하는 기후정의를 외친다. 그중 하나가 연 소득 4만달러 이하 저소득자에게 자동차를 가지지 않을 경우 1년에 세금 1천달러를 환급해주는 정책이다(소득공제가 아니다).

수도권을 둘러보자. 누가 차를 소유하고 매일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다닐까? 물난리로 고통받는 파키스탄 정부가 선진국들에 배상하라고 요구하듯, 우리 청년들도 잘나가는 장년층에게 기후위기 비용을 내라고 할 만한 사정이다. 불평등은 서로를 혐오하게 한다. 성별, 세대, 지역, 인종으로 찢겨 신조어에 휘둘리기 쉽다. 갈라쳐 누군가 덕 보게 할 신종 정체성들 말이다. 무수한 연구가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유대감이 떨어지고 개인은 돈이 많아도 건강상태가 생활수준이 엇비슷한 지역에 사는 이들보다 나빠진다고 보고한다.

정치전략가들은 뉴섬이 백악관에 성큼 다가섰다고 입을 모은다. 그가 대선에 나올 2028년이면, 기후문제를 최우선으로 삼는 청년들이 선거를 장악하는 중년이 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청년들만의 의제는 아니다. 100세 시대, 오늘의 60대 정치인들도 40년 고난의 행진을 예고받는다. 82살에 대통령직에서 내려올 조 바이든을 보며 장수정치를 꿈꾸는 분들도 있을 텐데, 정쟁에만 몰두해도 괜찮을지.

캘리포니아주의회에서 기후정책 법안이 통과되던 그때 열파가 몰아쳤다. 섭씨 43도. 에어컨 틀면 괜찮겠다 싶지만, 한참 달아오르던 시각 휴대폰마다 사이렌이 울렸다. 텔레비전도 끄고 책을 읽자는, 정전될 수 있다는 경고 문자였다. 아무리 정치를 뒷전에 놓고 기존 산업에 수그리며 재산을 모은다 해도 전기가 나가면 에어컨이 꺼지듯, 서울 강남 한복판이 물에 잠기듯 노아의 방주가 들어설 곳은 좁아져 가고 있다. 제일 취약한 사람까지 안전하길 바란다. 나머지 모두가 안녕할 것이다. 인간은 행동으로 역사의 물꼬를 터왔다. 60대 정치인들이 무훈을 쌓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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