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 오전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스토킹 범죄 피해자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 | 디지털뉴스부 데스크
“현행법상으로도 이 스토킹과 유사한 행위에 대해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상당히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그러나 다만 현행법 체계 아래서도 이러한 관계규정들이 대단히 소극적으로 운영되어서 인권보장 특히 여성들의 인권보호에 미흡함이 있지 않으냐 하는 문제의식을(…) 때문에 이 특별법을 반드시 제정해야 되느냐의 문제에 관해서는 공청회라든지 각계의 의견을 좀 더 신중하고 종합적으로 수렴해서….”
1999년 8월10일 스토킹 처벌에 관한 특례법안을 논의하던 15대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회의는 이같이 결론을 내지 않고 논의를 마무리했다. 회의에서 당시에도 문제가 됐던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인정했지만 기존 다른 법과의 충돌, 스토킹 행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 사회적 공감대 등을 이유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법안을 만드는 데 신중한 논의는 필수적이나 이후 더 진전된 논의가 사실상 없었다. 회기가 종료되며 법은 폐기됐다. 이후 20년 넘게 스토킹처벌법안은 ‘발의-폐기’ 과정을 반복했다. 스토킹이 ‘구애’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기존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토킹 가해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줬다.
2013년 3월22일 시행된 경범죄처벌법 처벌 대상에 ‘지속적 괴롭힘’이 담겼다.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잠복하여 기다리기 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범칙금 8만원에 불과했다. 당시 보도를 보면 경찰은 일선에 ‘거절 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3번 이상 만남이나 교제를 요구하면, 요구 횟수가 2회더라도 상대방에게 공포나 불안감을 주는 명백한 사유가 있다면 처벌 대상’이라는 지침을 내렸단다. 또다시 ‘잘못된 신호’를 사회에 줬다. 스토킹을 ‘용기 있는 남성의 구애 행위’로 묘사하는 드라마와 영화가 계속 나왔다.
잘못된 신호는 두고두고 수많은 스토킹 피해자들을 옭아맸다. 2021년 10월9일 법원은 서울교통공사 입사동기인 ㄱ(28)씨에게 2019년부터 “만나달라”며 스토킹하고 불법촬영물로 협박한 전주환(31)에 대해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의 신호는 가해자에게 용기를 줬다. 전씨는 이후 ‘내 인생 망치고 싶냐’는 취지로 ㄱ씨에게 합의를 수차례 종용했다. 스토킹과 불법촬영이 타인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사실은 ‘가해자의 인생’ 앞에서 은폐된다. ‘초범이라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해서’ 등 일부 경찰관, 검사, 판사 등의 가해자에 대한 ‘걱정’은 계속됐다.
지난해 10월21일, 1999년 처음 발의됐던 스토킹처벌법이 마침내 시행됐다. 22년 만의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가해자를 피해자와 격리하는 긴급응급조치·잠정조치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처벌 여부를 피해자의 의사에 따르는 ‘반의사불벌죄’를 적용한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스토킹 범죄를 저지르면 강하게 처벌받는다는 신호를 또 제대로 주지 못했다.
스토킹처벌법 시행 뒤에도 스토킹으로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이 살해당하고, 검찰이 스토킹 가해자의 구속영장을 반려한 뒤 40대 여성이 살해당하는 등 희생자가 계속 발생했다. 올해 1월 ㄱ씨는 전씨를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해 추가 고소했지만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앞서 1차 고소 당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이 영향을 미쳤다. 결국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전씨는 9월14일 선고 하루를 앞두고 ㄱ씨를 찾아가 살해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은 분명 ‘사회적 실패’다. 잘못된 신호가 나간 뒤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ㄱ씨는 생전 전씨에 대한 선고 전 마지막 공판을 앞두고 변호사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고 한다. ‘절대 보복하지 못하도록 엄중한 처벌을 해달라.’ 또다시 잘못된 신호를 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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