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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현석의 팔레트] 씨앗과 빗물

등록 2022-09-25 18:02수정 2022-09-26 02:40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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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문장 하나가 주는 울림은 글을 읽는 한가지 이유일 터. 심상하게 넘어가지 않는 한 문장은 새로운 사유를 촉발시킨다. 잠들었던 감각을 깨우기도 한다. 예전에 나는 황석영의 <객지>를 읽으면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간척지에서 노역을 하던 동혁은 오랜만에 읍내로 나와 신선한 과일을 본다. 가게 창틈으로 퍼지는 풋과일 향기가 노역에 찌든 동혁의 메마른 후각을 비처럼 적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귀심(歸心)은 화살과 같다던가.’

감각을 단숨에 휘감아 과거로 돌려버리는 이 문장은 내 안에서 동혁이란 인물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게끔 했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타들어가는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물고 마지막 투쟁에 임하는 동혁의 결의만큼이나 그가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어떤 과거들로 기억한다.

최근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문장 하나가 머리와 가슴을 같이 울렸다. 그런데 그 문장은 소설이나 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국내에 출간된 책도 아니었다. 번역하자면 <영향하의 생물학: 생태학, 농업, 보건에 관한 변증법적 에세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에서 진행 중인 세미나를 통해 접한 과학서였다. 이 책은 과학의 사회적 역할과 ‘시민 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던 두 저자, 리처드 레빈스와 리처드 르원틴의 공동저작물이다. 그중 내가 만난 문장은 다섯번째 장인 ‘유기체와 환경’에 있었는데, 이 장은 ‘유기체’와 ‘환경’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던 전통적인 시각을 잔잔하게 해체한다.

책이 일러주는 논의에 잠시 몸을 맡겨보자. 다윈이 진화론을 주창한 이래, 인간은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유기체는 환경이라는 외부 조건에 반응하는 것으로, 환경은 생명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생명체의 무대로 여겨지게 됐다. 인간은 이제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새롭게 인지했으나 이런 인식 틀은 여전히 환경을 외부 조건으로 본다. 즉, 유기체와 환경이 별개의 항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은 환경을 특정한 생명체가 채워 넣어야 하는 생태적인 빈터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기존의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환경을 유기체가 생장하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씨앗의 비유다. 씨앗은 빗물을 흡수해야만 발아할 수 있다. 이때 비는 씨앗 밖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이 아니다. 비는 그저 외부에 존재하는 자극만이 아니며, 씨앗 역시 빗물에 반응하기만 하는 독립된 유기체가 아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말한다. “빗물은 씨앗이 자라는 데 있어 종자피 속 단백질만큼이나 필수적이다”라고.

어디 빗물뿐인가. 토양, 공기, 햇빛 등 씨앗의 생장과 발육에 관여하는 여러 조건 중 어느 것도 씨앗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환경을 지키자!’, ‘환경을 구하자!’ 같은 구호를 곰곰이 되새겨본다면 큼지막하게 비어 있는 부분이 보인다. 환경이란 단순히 인간이 지키고 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라는 사실이다.

9월24일 토요일, 전국에서 서울로 모여든 수많은 인파가 한목소리로 ‘기후정의’를 요구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조직화된 대규모 집회는 2019년 이후 처음으로, 그사이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화석연료와 생명파괴 체제를 종식해야 한다는, 모든 불평등을 끝내야 한다는,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한다는 행진 주체의 3대 요구가 더욱 절실하게 들리는 까닭도 우리가 단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넘어, 하나라는 감각을 체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씨앗이 빗물이고, 빗물이 씨앗일 수밖에 없듯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우리라는 감각. 이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갖추어야만 하는 최소치의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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