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명령이 준엄한 것이라면 삶의 존엄은 엄연한 것이다. 준엄함과 엄연함 사이 균형은 어떻게 정해질까? 결국 정치가 결정한다. 그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의 아래에 윤리적 감각이라는 불편한 무엇이 있다. (…)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그것 없이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조형근 | 사회학자
집짓기의 로망과 욕망을 다룬 지난달 칼럼을 나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칼럼을 쓰기 시작할 때는 단독주택을 짓게 된 내 행운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두려웠다. 마무리할 때가 되자 그런 고민을 할 여유가 사라졌다. 처가 급한 질병으로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집 없는 설움이 도처에 곡진한 세상에서 가벼이 굴었던 대가인 것만 같다.
의사는 수술이 잘됐다고 말했다. 다만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직장에서 질병휴직도 받았다. 집에는 무조건 안정이 필요한 처와 큰 교통사고 뒤 요양병원에 계시다 옮겨온 장모님까지 두명의 환자가 머물게 됐다. 당연히 내가 살림을 도맡아야만 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게는 살림 능력이 없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도 중대한 논점이겠다. 그걸 따지기 전에 당장은 먹어야 했다. 결국 새벽배송에 의지하기로 했다.
처음 경험해본 새벽배송의 세계는 마치 산타의 기적 같았다. 전날 밤 주문했는데, 이른 새벽 현관문을 열면 큰 박스가 놓여 있었다. 그 속에 선물처럼 온갖 먹거리가 준비돼 있어서 그저 데우고 건사해서 차려내면 됐다. 선물을 배송한 노동자가 산타처럼 느껴졌다. 박스만 놓아둔 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돈만 내면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펼쳐지는데 억지로 불편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할까? 처가 회복하고 나면 고민이 닥칠 것이다.
세상의 불평등을 개선하고 사람들과 연대를 실현하는 일은 당장 이루기 어렵다. 실은 매우 어렵다. 실제로 무언가 하려면 용기를 내야 하고 때로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세상은 매섭고 나는 두렵다. 대부분 마음만 앞서게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모 아니면 도라며 손 놓고 지낼 일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자고 다짐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먹는 일들의 목록이 있다. 내 경우는 전통시장 이용하기, 배달앱 사용하지 않기, 새벽배송 이용하지 않기 따위였다. 갈수록 대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의 처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지켜온 습관들이다. 서울 살 때도, 여기 파주로 이사 와서도 전통시장을 기본으로 이용했다. 가끔 시장에 없는 것들을 살 때만 대형마트에 갔다. 자연스레 단골가게가 생기고 물건 사는 맛이 난다. 몇년 전 집 바로 옆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그 습관이 무뎌졌다. 바쁜 생활 리듬에 슬리퍼 신고도 갈 수 있는 곳에 대형마트가 생기자 그 편리함을 거부하지 못했다. 처가 수술을 받게 되면서 이제 새벽배송도 이용하게 됐다. 남은 건 배달앱 사용하지 않기뿐이다. 짜장면도 치킨도 배달시키는 습관 자체가 없다 보니 이건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배송을 보면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긴 하지만.
세상의 불평등 구조를 바꾸지 못하는 작은 실천들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런 실천들이 차곡차곡 쌓인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착한 소비자’가 ‘선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한다. 자칫하면 내 마음이 덜 불편하고 싶다는 자족감을 채우는 데 그치게 된다. 그러니 약간의 사정만 생겨도 쉽게 무너진다. 살다 보면 누구나 약간의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기 마련이라 결국 힘없는 행동이다.
좀 더 실질적이고 정책적인 질문도 나온다. 이를테면 대형마트에 안 가면 전통시장은 살아날까? 새벽배송을 넘어서 1시간 이내에 배달해준다는 퀵배송 시장이 성장하는 시대다. 마트 대 시장의 단순한 구도가 문제가 아니다. 물류와 유통의 근본 구조가 바뀌고 있다.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취지의 각종 지원과 경영혁신 시도들의 성과가 뚜렷하지 않은 이유다. 소비자의 양심에 호소해봐야 소용없다. 한국 서비스업의 전반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영업의 규모가 지나치게 영세하니 생산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협동조합화와 지역, 전국 네트워크 연결 등 대형화를 위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도해야 할 이유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도 하게 된다. 대형마트의 직원들, 배달로 매출 올리는 자영업자들, 새벽배송하는 노동자들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닌가? 자본이 있는 곳에 노동자도 있는 법이다. 그들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저 노동을 하고 보람도 느낀다. 새벽배송을 하면 야간근무 추가수당을 얻고, 도로도 막히지 않으며, 비대면 업무라 마음고생도 덜하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보다 나의 윤리적 자족감이 앞설 수는 없지 않을까?
저 준엄한 밥벌이의 명령 앞에서 작은 실천들이 갖는 윤리적 의미와 사회적 가치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다. 이렇게 “먹고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모든 것에 앞서게 되면 많은 것들이 바뀐다. 2015년 이전까지 새벽배송이란 일부 사업자들 사이에만 통용되던 방식이었다. 보통사람들 삶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제 윤리와 제도의 제어가 없는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밤새 일하는 노동자들은 수면 부족으로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가족관계와 인간관계가 황폐해진다. 야간에 일하다 보니 사고 위험도 높다. 안 그래도 산업재해가 급증하는 택배노동 환경이 더 열악해지고 있다. 내 따뜻한 아침밥을 위해서.
밥벌이의 명령이 준엄한 것이라면 삶의 존엄은 엄연한 것이다. 준엄함과 엄연함 사이 균형은 어떻게 정해질까? 결국 정치가 결정한다. 그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와 공감과 분노 같은 여러 요소들의 아래에 윤리적 감각이라는 불편한 무엇이 있다. 마트와 새벽배송, 배달앱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거리낌이 느껴진다면 거기에 윤리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 윤리로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그것 없이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먹으면 병 걸리고 죽는 게 아니라면 없는 사람들이 부정식품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윤리적 감각일 것이다. 그 감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아이들이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세상에서 ‘선택의 자유’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곧 새벽배송을 그만뒀다. 처의 사정을 알게 된 이웃들이 나섰다. 일곱 집이 조를 짜서 매일 반찬을 해서 날라왔다. 먹을거리가 너무 많아져서 간격을 늘리고 양을 줄여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식탁이 오히려 풍성해졌다. 이웃살이하는 마을에 사는 복이다. 앞으로도 새벽배송을 다시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모두가 우리처럼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윤리적 감각을 지켜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렇게 삶이 엄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