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6일 정부가 발표한 ‘새 정부의 경제정책방향’에 담긴 연금개혁 추진 내용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마련한 ‘110대 국정과제’에서 밝힌 계획을 되풀이한 수준이다. 연합뉴스
[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대통령의 영국 여왕 참배 취소는,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으나, 대영제국의 총칼 아래 고통받고 아직도 그 후유증을 떨치지 못한 수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인들을 대신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속어 논란도 간단히 사과했다면 경선 때 욱하며 미국 시민들과 욕설이 포함된 설전을 종종 보여준 조 바이든 대통령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궁금하진 않겠지만, 나는 바이든으로 들었다. 텔레비전 시청 때 자막은 읽지 않는다. 내가 바이든이라 들을 자유를 위해 다른 이들이 뭐라 듣건 관여하지 않겠다. 대통령과 여당도 그래 주길 바란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설 때마다 ‘자유’를 부르짖고, 박빙으로 대선에 패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기회 될 때마다 ‘기본’을 역설해 우리는 이 둘이 대립적인 개념이라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유의 의미는 노예제라면 족쇄를 깨는 것이겠고, 봉건제라면 재산을 소유할 자유에 기반한 시장경제를 세우는 것이겠다. 그런데, 칼 폴라니에 따르면 “자유방임(laissez-faire)이야말로 자생적 진화가 아닌 의도적인 국가 개입의 산물이었다.” 폭력적인 종획운동(Enclosure)법으로 농민을 내쫓아 노동자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단결금지법을 통해 노동자의 조직화를 무력화시켰다. 최근 사례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있다. 대기업 증세로 확보한 예산을 기후위기와 국민건강 보호에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지만, 이 법은 노골적인 자국 기업, 자국민 보호법이기도 하다. 실제 미국은 경제 운용과 외교정책에 있어 자유주의와 호혜성 원칙에 충실했던 적이 거의 없다.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자유 지상주의자도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다. 가진 자의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려운 사람을 최소한도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현금 제공이 빈자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것도 이들이 복지보다 기본소득을 선호하는 이유이다. 물론,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가 옹호하는 부의 소득세로서의 기본소득은 문제가 많다. 서울시 안심소득 실험 1단계 현재 참여자격은 중위소득 50% 이하이면서 재산 3억2600만원 이하다. 소득은 전혀 없으나 재산이 3억3천만원인 사람과 재산은 월세보증금 수준의 1천만원밖에 안 되지만 중위소득의 55%를 버는 사람은 배제된다. 과연 이들 중 누가 더 어려운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까? 비정규직과 실업, 플랫폼 노동의 확산으로 월별 소득이 매우 불규칙해지고 있는 상황과 수해나 병원비 지출 등 생각지 못한 재난에 따른 소비까지 고려한다면 일단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사후에 모든 소득과 재산에 대해 누진적으로 과세하고 정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과 여당도 고령자의 실질적인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제1야당이 제안하고 있는 기초연금 인상과 65살 이상 전체 지급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면 좋겠다. 빈곤 노인층을 위해서는 생계급여와 기초연금의 중복 수급을 허용해야 한다. 모든 고령자에게 기초연금이 지급된다면 정부가 원하는 연금개혁에 대한 저항도 일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선별 지급을 강조하는 협소한 관점을 가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학자의 의견에 우리 국민의 삶을 맞추려 하지 말라. 재원 마련은 이미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부자를 위한 감세 포기부터 시작하면 된다.
모든 자유의 기본은 생계 안정이다. 생계 안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제가 정상화돼야 한다. 기본소득은 경기 위축기에 필수적인 구매력을 확보함으로써 이 두 목적에 모두 도움이 되는 정책이다. 지금은 한가로이 대통령의 지난 해외순방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가 아니다. 걸프전 승리로 지지율이 90%에 육박했던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경력이 짧고 문제가 많았던 클린턴 후보가 막을 수 있었던 마법 같은 슬로건을 생각할 때이다: “It’s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바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