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를 대표하는 전·현직 브라질 대통령의 맞대결이 30일 결선투표에서 최종 판가름나게 됐다. 왼쪽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 오른쪽은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AFP 연합뉴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지난 2일 실시된 브라질 대선은 승자를 가리지 못했다. 두차례 대통령을 역임했던 노동자당 소속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를 확정하리라는 예측도 있었다. 다양한 좌파, 녹색 정치세력들만이 아니라 중도파 정당들까지 대거 룰라 진영에 합류했기에 이런 예측이 호들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룰라는 48.4%를 득표해 간발의 차로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집권 중에 극우 선동만 일삼으며 팬데믹 국면에 실정을 거듭한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은 애초 예상보다 높은 43%의 지지를 얻었다. 부유한 남부 주들의 중산층이 여전히 좌파보다는 극우파를 선택한데다, 동성애 혐오나 낙태 반대에 동조하는 개신교 일부 종파 신자들이 보우소나루에게 표를 몰아준 결과다. 진보적 개헌안이 부결된 한달 전 칠레 국민투표에서도 드러났듯이, 남미 곳곳에서도 극우 포퓰리즘의 반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아무튼 브라질은 이달 30일에 대선 결선투표를 해 최종 당선자를 가리게 된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룰라의 승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보우소나루의 상승세도 무시할 수 없어 결과를 장담하기 힘들다. 앞으로 몇주 동안, 중남미 전체의 향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 대국의 치열한 선거전에 세계인의 눈길이 쏠릴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정치에 이렇게 열띤 관심을 보이는 것이 그 자체로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중남미 좌파 붐에 주목하거나 남미 어느 나라 선거나 사회운동을 상세히 소개하면, 대뜸 “거기에서 배울 게 있느냐”는 반문이 따른다. 대한민국쯤 되면 북유럽 국가들을 바라보거나 여전히 미국에서 배워야지 왜 남반구 국가들에 시간을 허비하느냐는 투다. 브라질은 그나마 낫다. 화제가 베네수엘라 등으로 튀기라도 하면, 마치 입 밖에 꺼내선 안 될 이야기를 발설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한국 식자들 특유의 촌스러움을 드러내는 풍토병의 증상일 뿐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늘 추격 경쟁에서 앞서가는 자들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데 한정될 수는 없다. 이른바 모범 사례를 찾아 헤매는 것만이 나라 밖을 향해 귀와 눈을 열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야말로 오래전 ‘서유견문’식 세계관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중남미든 아프리카든 세상 곳곳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들과 그물처럼 엮인 세상 속에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진실에 있다.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시대 자본주의는 그런 엮임의 강도와 복잡성을 극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지금 브라질 대선 결선이야말로 이런 현실의 한복판에 대두한 일대 사건이다.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룰라가 당선돼 펼칠 정책이 우리에게 모범 답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보우소나루의 선동 내용이 우리에게도 어느덧 익숙해진 혐오의 정치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이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브라질인들의 정치적 결정과 연결돼 있다.
룰라가 집권하던 시절 아마존 열대우림은 오랜 남벌과 난개발에서 한동안 벗어났지만, 보우소나루 정권 아래에서 전례 없는 속도로 파괴됐고 산불도 빈발했다. 파괴 정도가 너무 심해 이제 아마존 우림은 탄소를 흡수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출하는 지경이다. 이는 지구 가열을 기후과학자들도 예상 못 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끌 위험 요소 중 하나다. 4주 뒤 브라질 유권자들이 룰라와 보우소나루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에 따라 기후위기의 양상과 속도, 완화 가능성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브라질 대선 결선은 브라질만의 일일 수 없다. 이제껏 미합중국 대통령선거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인의 선거다. 인류와 지구의 운명을 건 대회전이다. 다른 무슨 대의 이전에 나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룰라 후보와 지지자들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며, 충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