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6만1천명 노인을 해고하다

등록 2022-10-19 18:55수정 2022-10-20 02:37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앞 광장에는 유엔이 정한 제32회 ‘세계 노인의 날’을 맞아 일하는 노인의 고용안전망 강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신효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jinnytree@hani.co.kr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앞 광장에는 유엔이 정한 제32회 ‘세계 노인의 날’을 맞아 일하는 노인의 고용안전망 강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신효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jinnytree@hani.co.kr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코로나 때문에 사람도 못 만나고 힘드시죠?”
“요즘은 그래도 나아. 경로당에 모여서 밥은 해 먹거든.”

“오, 그래요! 드디어 열었네요. 그럼 누가 밥해요? 순번을 정해서 하시나요?”
“아니, 젊은 사람들이 하지.”

“경로당에 젊은 사람도 있어요? 저는 한번도 못 봤는데….”
“있지. 칠십대.”

“칠십대요?”
“그럼. 나 같은 팔십대는 힘들어 밥 못해. 젊은 애들이 해야지.”

알고 보니 그 젊은이(!)들은 ‘공공형’ 노인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경로당에서 식사 도우미 일을 하는 동네 분들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할머니도 수요일마다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매달 27만원을 받고 있다.

최근 정부는 ‘공공형’ 노인일자리를 6만1천개 줄이고 대신 민간 ‘서비스형’ 노인일자리 1만5천개, ‘시장형’ 일자리 2만3천개를 늘린다고 발표했다. 일자리 수는 줄었으나 전체 예산은 56억을 늘여 “절대적인 규모는 크게 변화가 없다”(추경호 부총리)고 한다. 하지만 이 정책 변화는 할머니에게는 해고 선언이나 다름없다. 할머니 집에 왕진 갈 때마다 처음 하는 일은 진료 상담이 아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벽시계에 시계 밥을 주는 일이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아무리 애를 써도 벽시계에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할머니도 허리 숙여 청소하거나 휴지를 줍는 ‘공공형’ 일자리에는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서비스형, 시장형 일자리는 불가능하다.

비단 이 할머니뿐만이 아니다. 여기 시골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와도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다. 동네를 다 뒤져도 주민센터 같은 공공기관을 제외하곤 대부분 노인뿐이다. 식당 주방일(서비스형)이나 공장과 점포 일자리(시장형)는 찾기 어렵고, 있다 해도 문제다. 한달에 한번 병원 가는 것도 힘겨워하는 시골 노인들이 어떻게 출퇴근할 것인가. 그런 일자리는 도시에 살고 상대적으로 젊은 고학력 노인들에게나 열려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마치 새로운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하는 정책 변화의 실상은 ‘기회의 몰빵’이다. 이미 기회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주고, 기회가 적은 사람에게는 가지고 있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할머니는 시내로 일을 다녀오곤 했다. 할머니가 옆집 사는 친구와 함께 일 나갔다 돌아오는 밤이면 할아버지는 삼거리 버스정류장 근처를 서성이며 버스를 기다렸다. 먼발치에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할머니가 보이면 못 본 체 등을 돌려 집으로 먼저 돌아와 방 불도, 껌껌한 마당에 백열등도 환하게 켜놓았다. 함께 걷던 할머니의 친구는 껌껌한 어둠 속에 묻힌 자기 집 대문을 바라보며 이렇게 투덜거렸다. “○○네 아빠가 마중 나왔다가 이제 집에 들어가셨나 보네. 으이구, 우리 남편은 지금 자빠져 자고 있나 봐.” 그럴 때면 할머니는 자신을 마중해주는 마당의 환한 불빛이 그렇게 고맙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여년.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시내로 일 나가는 게 불가능한 할머니는 노인일자리라는, ‘27만원’의 불빛에 기대어 혼자 남은 삶을 살아내셨다.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한겨울 기름값도 그 돈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불빛마저 사그라들려 한다.

허리통증 주사를 놓아드린 뒤 한 시간은 가만히 누워 있기를 당부하고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거기 봉다리 가져가” 한다. 문 앞에 보니 검은 비닐봉지 세개가 다정하게 놓여 있다. 봉지 안에는 왕진 온 의료진 세 사람을 위한 고구마가 들어 있다. 주사 맞으면 못 일어날 것 같아 미리 준비해놓으신 거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그 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불빛은 꺼져도 할머니는, 어쩌면 우리는 이 다정함의 불빛으로 또다시 살아낼 거라고. 할아버지의 불빛이 할머니에게 그러했듯이.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독재자 감별 테스트…윤석열의 점수는? [유레카] 1.

독재자 감별 테스트…윤석열의 점수는? [유레카]

‘500명 증원’이었으면 환자 곁에 남았을까 [아침햇발] 2.

‘500명 증원’이었으면 환자 곁에 남았을까 [아침햇발]

시골에 웬 공항이냐는 그 말 [서울 말고] 3.

시골에 웬 공항이냐는 그 말 [서울 말고]

‘비겁한 미치광이’와 그 졸개들 [뉴스룸에서] 4.

‘비겁한 미치광이’와 그 졸개들 [뉴스룸에서]

검찰개혁의 당위성 보여준 디스커버리 무죄 [아침햇발] 5.

검찰개혁의 당위성 보여준 디스커버리 무죄 [아침햇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