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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현석의 팔레트] 괴수의 목소리

등록 2022-10-23 17:46수정 2022-10-24 02:38

일본 정부가 미나마타병으로 숨진 어머니의 질병을 인정하지 않은 데 항의해 소송을 해온 미조구치 아키오가 2013년 4월16일 최종 승소 판결을 받은 뒤 환호하고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미나마타병으로 숨진 어머니의 질병을 인정하지 않은 데 항의해 소송을 해온 미조구치 아키오가 2013년 4월16일 최종 승소 판결을 받은 뒤 환호하고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공단 근처에 살았다. 굴뚝 연기가 무성한 등굣길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어디서 흘러나온 폐수인지 고인 물은 지독하게 검어 빛조차 반사되지 않았다. 학교를 갈 때는 지각을 할까 빠르게 지나쳤던 그 연못이 하굣길이면 놀이터가 됐다. 친구들과 나는 검은 연못 주변에서 서로의 등을 밀치고 다리를 걸어 넘기며 낄낄댔지만 정작 빠진 적은 없었다. 장난으로라도 빠진다면 성히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은 본능으로 알았으니까.

검은 연못이 하굣길의 ‘핫플’이었던 까닭은 바로 옆에 비디오 가게가 있어서였다. 당시 최고 인기작은 <울트라맨>으로, 연못 곁에서 낄낄대던 아이들의 즐거움은 부모님이 늦게 돌아오는 친구의 집에서도 계속됐다. 울트라맨이 괴수를 무찌르는 장면까지 보고 나면 우리는 정의의 사도로 변했고, 다들 서로를 괴수로 칭하면서 ‘울트라빔’을 쏘아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겨울, 일본에서 열린 환경보건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던 나는 울트라맨과 다시 조우한다. 미나마타병을 주제로 했던 세션이었는데, 이 수은중독 사건이 최초로 보고된 1956년부터 연구해온 노학자가 연단에 올라서서 물었다. “여러분은 울트라맨을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 사람들도 국적 불문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거기 등장하는 괴수들 중 상당수가 환경오염의 피해자인 것은 아십니까?” 괴수의 사정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에 허를 찔리는 기분이었는데 이어서 그가 덧붙인 말에 장내가 숙연해졌다. “미나마타병은 울트라맨처럼 누구나 다 아는 병이 됐지만 정작 그 병의 피해자들은 여러분들이 잊은 괴수들처럼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실로 그러했다. 1956년 5월에 첫 환자가 보고되고 반년 만에 중금속 중독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수은과 질병 간의 인과성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13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오염원을 배출한 가해기업 짓소의 미나마타 공장은 그사이에도 폐수를 계속 배출하다가 정부 발표가 있기 직전에 공장을 철수했다. 5년에 걸친 집단 소송 끝에 환자들과 짓소 사이에 협정서가 마련됐으나 1977년 일본 정부는 돌연 미나마타병의 인정기준을 엄격하게 개정한다. 그로 인해 피해자 2천여명의 구제신청이 기각된다. 기각된 피해자들 중 일부는 취소청구 소송을 진행하여 승소하지만 정부는 다시 고등법원에 항소했고, 단 한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소를 취하한다. 그 한명이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미나마타병임을 인정받은 것이 1997년. 40여년에 걸친 외로운 투쟁 끝에 비로소 성과를 거두자 반세기 가까이 숨어 있던 환자들은 그제야 인정신청을 할 용기를 얻는다. 이때 생존해 있던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이미 70대를 훌쩍 넘긴 뒤였는데, 같은 세월 동안 가해기업 짓소는 제이엔시(JNC)로 사명을 바꾸어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거듭난다.

어떤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이미 가시화된 피해자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환경오염 피해자인 ‘괴수’의 울부짖음을 울트라맨이 처단함으로써 이 세계의 질서를 옹위하는 것처럼, 그 사실을 당당히 밝혔을 때 사회적 돌팔매가 뒤따른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네가 약하니까’, ‘네가 부족하니까’, ‘네가 그렇게 위험한 곳에 있었으니까’ 따위의 말로 ‘당한 자’라는 돌출된 존재를 침묵시키기만 하면 세상은 평화로우니까. 지금 우리 곁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중대재해는 이 가짜 평화의 결과다. 그러므로 지금 가장 필요한 일은 괴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아닐지. 저마다 울트라맨이 되어 타자를 짓밟는 세상에서 괴수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일. 가짜 평화에 균열을 내는 첫걸음은 바로 이 ‘듣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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