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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누가 반이성적이었나?

등록 2022-11-02 18:40수정 2022-11-03 02:33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현장 골목 앞에 지난달 30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현장 골목 앞에 지난달 30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남종영 | 기후변화팀 기자

‘스탬피드’라는 현상이 있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초원, 어슬렁거리던 사자가 고개를 돌리니, 얼룩말 한 마리가 대열에서 뛰쳐나간다. 나머지 얼룩말도 일제히 뒤를 따른다. 군집을 이룬 동물들 중 갑자기 한 마리가 뛰쳐나가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현상이 스템피드다. 우리가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앞으로 나가면 다들 무의식적으로 발을 떼는 현상도 바로 이 스탬피드다.

스탬피드는 비슷한 다른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군중 압사사고를 말한다. 많은 외신에서 이번 이태원 재난을 이르며 스탬피드라고 불렀다. 군중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 키스 스틸(영국 서포크대 방문교수)은 ‘스탬피드’라는 용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압사사고는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뭉쳐있고, 사람들이 미는 힘으로 넘어져서 발생한다. 반면 스탬피드는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 뛰어드는 장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압사사고를 반세기 전의 추석 귀향 행렬, 하지에 참가하려는 이슬람 순례객, 축구장에서 술 취해 난동을 부리는 관중에게나 볼 법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최첨단을 달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희생자들을 마주하고 있다.

군중 압사사고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많지 않다. 2018년 스웨덴 최고 의과대학인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마리아 모이티노 데 알메이다 연구원 등이 압사사고에 대한 다수의 영어 논문을 분석했는데, 2016년까지 64개를 찾았을 뿐이다. 그들은 압사사고를 ‘군중의 질서정연한 이동이 깨져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압사사고가 나는 메커니즘은 비슷하다. 평소 자유로웠던 군중의 이동 흐름에 과밀도가 높아지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된다. 누군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뒷사람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앞사람을 밟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러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밑에 깔린 사람들은 다치거나 숨지게 되는 것이다.

이 연구원이 분석한 논문들은 압사사고에 대한 다양한 면을 포착했다. 가로 세로 1m당 5.26명이 넘으면 사고가 발생한다는 결과도 있었다. 군중의 일제 행동을 일으키는 방아쇠가 피해를 키울 수 있다. 이를테면, 10월초 인도네시아 말랑의 축구장에서 벌어진 압사사고는 최루탄이 방아쇠가 됐다. 놀란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달려가다 뒤엉키면서 100여명이 숨졌다.

압사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에는 많은 군중, 단위면적당 높은 군중 밀도, 출구의 부족 등이 꼽히지만, 여러 연구자가 지적한 것이 ‘병목(bottleneck) 효과’다. 원래 사람들은 대열을 이뤄 걸을 때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고 흐름을 타면서 협력한다. 그런데, 병주둥이처럼 좁은 길목을 지나가면 문제가 생긴다. 대열이 활 모양처럼 좁아지고 사람의 신체 압력이 증가하면서, 전체적인 협력 행동이 깨지고 마는 것이다. 이번 이태원 사고에서도 골목으로 튀어나온 건물 출입구 계단이나 철제 가벽이 군중의 협력을 망가뜨렸다.

과거에는 압사사고가 공포에 빠진 군중의 비이성적인 행동의 결과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저개발국가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편견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선입견과 반대로 군중의 합리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논문의 저자는 말한다.

“압사사고 경험자와 피해자에 대한 질적 연구를 보면, 아주 급박한 순간에도 군중은 서로 협력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압사사고를 막기 위해 조직적으로 한몸처럼 움직인다.”

1989년 영국 셰필드에서 100명 가까이 숨진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사고에서는 사건 직후 관중의 음주와 약물이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나중에 이와 관련된 특이 수치는 없는 것으로 보고됐다. 동물의 스탬피드도 이성적인 행동이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안전이 위협되는 상황에서 포식자에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진화의 결과물이다.

오히려 압사사고를 막기 위해선 다수의 출구를 만들어주고(차도를 열어주는 것), 진입 시간을 통제하고(지하철 무정차), 좁은 길목을 없애는(골목의 장애물 철거) 등 군중의 흐름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간의 연구는 말하고 있다. 이태원에서는 이 모든 게 없었다.

나는 폭 3.2m 골목에 몸이 막혀 군중의 압력이 가슴을 죄어올 때,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뒤로, 뒤로”를 잊을 수 없다. 급박한 순간에도 이들은 이성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 경찰 한 명이 없었던 사실이야말로 반이성적이었던 것이다.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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