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린 마일스는 수화 연구를 위해 오랑우탄 찬텍과 대학 사택에서 8년 넘게 함께 살았다. 마일스가 찬텍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채터누가 테네시대학 제공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남종영 | 환경논픽션 작가
얼마 전 강연에서 집에서 사람처럼 길러져 수화 수백개를 익힌 오랑우탄 ‘찬텍’ 이야기를 하다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받았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람과 동물이 대화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인공지능(AI)이 없던 시절에도 종을 넘어선 의사소통 시도는 있었다. 다만, 사람이 동물에게 자신의 언어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했을 뿐.
가장 기이한 사례는 1960년대 중반 카리브해 한 섬에 돌고래와 사람이 함께 사는 이층집을 짓고, 돌고래에게 영어를 가르친 신경과학자 존 릴리와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 이야기다. 지금 시점에선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미 항공우주국(NASA)이 재정을 지원한 범상치 않은 시도였다. 지구 밖 지적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깡그리 무시할 수 없는 기관으로선, 일종의 ‘예행연습’으로 바다의 지적생명체인 돌고래와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게 그럴듯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돌고래에게 사람의 성대 같은 발성 기관이 없었기에, 실험은 당연하게도 실패로 끝났다.
1950~70년대 열마리 이상 유인원도 인간과 함께 살면서 수화를 배웠다. 인간처럼 기저귀 차고 젖병을 든 채 텔레비전을 봤다. 침팬지 ‘워쇼’와 ‘님 침스키’, 오랑우탄 ‘찬텍’, 고릴라 ‘코코’ 등은 수화를 통해 인간과 소통함으로써, 언어 구사가 인간만의 능력이라는 당시의 편견에 균열을 냈다.
하지만 그 실험은 동물에겐 끔찍한 일이었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겼던 그들은 덩치가 커지자, 실험실과 동물원 철창 안에 갇혔다. 찬텍은 동물원 창살 너머로 자신을 키운 양모에게 말했다.
“엄마 린, 차에 가자, 집에 가자.”
이제 더는 동물을 반인반수의 괴물로 만들면서까지 부질없는 실험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과학계는 동물 고유의 언어를 발견하고 존중하게 됐다. 일군의 과학자들은 야생 침팬지의 몸짓 언어를 장기간 관찰해 ‘여기 와’, ‘안아주면 좋겠어’ 등을 포함한 ‘침팬지 어휘록’을 만들었다. 개의 언어는 인간이 가장 잘 알고 연구가 이뤄지는 주제다. 귀를 쫑긋 세우는 행동은 ‘나는 당신을 경계하고 있어’, 배를 보이고 드러눕는 건 ‘난 네가 좋아’라는 의사 표시다.
물론 동물의 언어가 고도의 구문과 문법을 가진 인간의 것과 비슷해 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몸짓과 발성만으로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인간 언어에 내재된 패턴과 유사성이 있을 거라고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이런 전제가 맞다면, 동물 언어의 빅데이터를 쌓고 머신러닝을 이용하면, 동물이 말하는 바를 번역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도 영상을 통해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달 초, 미국의 과학대중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 연구현황을 다룬 기사를 실었다. 카리브해 향고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향고래가 서로를 식별하기 위해 ‘코다’라고 불리는 특정 소리의 패턴을 사용하고, 마치 인간 아기가 어른의 말을 따라 하며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성체의 소리를 따라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향고래 소리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인공지능이 이를 패턴별로 분류해 학습하게 하면, 침팬지 어휘록보다 훨씬 방대한 수준의 사전을 만들 수 있다. 어쩌면, 바다에 어떤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과 개 관계에서는 서로를 중재하는 번역기가 나올 수도 있다.
다른 과학자들은 돼지의 소리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이들의 감정상태를 예측할 수 있는 걸 확인했다. 비록 긍정, 부정으로 단순화된 형태였지만 말이다. 이 연구가 발전하여 공장식 축산 농장에 갇힌 돼지들의 감정상태나 말을 우리가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언어의 가교를 놓는 작업은 인간과 자연 관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동물은 자의식이 없고, 언어도 없고, 심지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이 이제 동물 자신의 언어에 의해서 부정될 수 있다. 동물의 즐겁고 위트 어린 한마디, 진지한 이성과 절규를 우리가 대면하면, 동물을 일방적으로 이용, 착취해 온 관습을 바꿀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