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그와의 마지막 만남을 잊을 수 없다. 침대맡에 다가섰을 때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깨를 살짝 흔들어보았다. 그가 부스스 눈을 떴다. 퀭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마침내 내 얼굴에 초점을 맞췄다. 메마른 입술이 조금 열리더니 한숨이 새듯 조그맣게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놀랍고 반가웠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텅 비어 있었다. 놀라움이나 반가움은 물론, 귀찮거나 피곤한 기색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공허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손을 잡고 말을 건네봤지만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눈꺼풀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얼마 뒤 그의 부음을 들었다. 오랜 지인인 그는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정신질환에 관한 책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의사라는 이유로, 아이가 한때는 심한 증상들을 겪었지만 이제 회복해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정신질환 가족들의 연락을 받곤 한다. 그 고통과 외로움이 얼마나 큰 줄 알기에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마음 아파해주는 것만도 힘과 용기가 된다. 때로는 우리 가족의 경험을 들려주고, 의견을 물어보면 아는 범위 안에서 조언하기도 한다.
무슨 대단한 공감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그 자리에 서봤고, 정확히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는 것뿐이다. 그런데 가끔 대화가 순조롭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가족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어떻게 하면 병이 낫느냐, 최소한 좋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말을 해준다고 도움되는 것은 아니기에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를 강조한다. 약을 먹으라는 것이다. 약을 먹지 않고 낫는 방법을 찾는 분이 의외로 많다. 독한 약을 어떻게 평생 먹느냐고 하소연한다. 나는 대답한다. “약을 밥이라고 생각하세요. 밥을 평생 먹는다고 절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희 아이는 약을 깜박 잊고 먹지 않는 날이 1년에 하루도 안 됩니다.”
정신병 약을 꾸준히 복용하기란 매우 힘들다. 나는 아이가 먹는 약을 먹어보고서야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이해했다. 누군가는 ‘완전히 물에 적신 뒤 꽁꽁 얼린 털옷을 온종일 입고 있는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환자가 약을 기피하는 데는 그 밖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극복하는 방법은? 피할 게 아니라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꾸준히 약을 쓰면 뇌기능이 조금씩 좋아져 스스로 약이 도움된다고 느끼는 날이 반드시 온다. 일단 그 단계에 도달하면 약의 부작용에 대처하기도 훨씬 쉽고, 이후의 삶을 설계할 수도 있다. 그때까지 가족은 끊임없이 격려하고, 약을 먹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해야 한다.
약을 먹는다고 항상 낫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병이 그렇다. 가장 가능성이 큰 방법으로 열심히 치료할 뿐이다. 나는 정신질환을 그냥 뇌의 병으로 보라고 조언한다. 암이라면 항암제, 폐렴에 걸렸다면 항생제를 쓴다. 뇌의 병에는 항정신병 약을 써야 한다. 인터넷과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아무 말이나 늘어놓을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약에 대한 의심을 부추겨 돈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사기꾼이 너무 많다. 특히 환자에게 공감하는 척, 어린 시절 트라우마 운운하며 부모와 가족을 비난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된 것 같아 걱정이다. 한때 자폐 부모에게 ‘냉장고 엄마’라는 낙인을 찍었던 것과 다름없는 야만적 사고다. 이런 서사 속에서 자란 환자들은 정신병의 혼란 속에 부모를 증오하고, 병을 부모 탓으로 돌린다. 당연히 약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와 화해해야 한다며 부모를 헐뜯는 사이비에 매달린다.
그 지인은 오래전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지금처럼 약이 좋았다면,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 꾸준히 약을 썼다면 훨씬 풍성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정신병 낫는 방법이 있느냐고? 있다. 약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족쇄가 아니라 열쇠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