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정나리 | 대구대 조교수
화장실 앞을 지날 때마다 ‘교수전용’이라 인쇄된 A4용지를 문짝에서 떼어내야겠단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뭔가 휑해서 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연 스티커만 하나 붙어 있고 그 종이는 없다. 화장실은 이제 누구의 전용도 아니다! 종이를 붙여 놓으면 그만 다들 그렇게 믿어 버렸고, 곧 사실이 되어 그 힘에 얽매였는데, 어떤 경위에 의해서건 마침내 누군가가 떼어내 버렸다. 굳이 따지자면 여전히 ‘비흡연 인간전용’이랄 수 있겠지만 비인간 행위자들은 개의치 않고 들락날락한다. 물, 늘 새로운 고등 미생물을 품어내는 타일, 환풍구를 통해 이동하는 공기, 구석의 밀대, 거미줄 등, 이 ‘화장실’이라는 시공간의 다양한 행위자들은 네트워크를 이루어 움직인다. 내부인/외부인, 정규직/비정규직, 서울/지방, 선진국/후진국, 문명/야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회적’ 분류체계는 ‘사소’하다.
사소하다지만 실로 거대해서, ‘지킬 게 많은 이들’, ‘잃을 게 적은 이들’과 같이 이원론적인 분류체계들의 대결은 20세기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다 어느새 ‘신기후체제’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게 된 이런 방식의 인식은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를 하나의 점으로 하는 일련의 사유 네트워크에 빚지고 있다.
라투르의 마지막 책은 슐츠와 함께 쓴 <녹색 계급의 출현>(원제 <새로운 생태계급에 관한 메모>)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망은 수세대에 걸쳐 점점 커졌을 뿐 아니라 심지어 엘리트 지배층에까지 스며들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열망은 뜨거웠는데, 1917년 연재된 이광수 소설 <무정>에서 등장인물들은 ‘내 뜻대로’ 살 수 있다는, 우린 ‘다 같은 사람’이라는, ‘누구와도 같지 아니한 나만의 고유한 색채’가 있다는 ‘새로운 발견’을 한다. 그렇게 모두에게 공명한 근대의 명제는 세상을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조직해 낸 탓에 우리는 남/북의 아픈 분류체계를 하나 더 껴안고 있다. 결과야 어떻든, 치열하게 싸웠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두 이념이 똑같이 전제하는 건 물질의 생산이다. 그래서 라투르와 슐츠는 ‘근대적’ 생활양식, 즉 내 삶의 ‘물적 조건’의 파괴력에 섬찟하나 손발이 묶인 ‘누군가’들을 호명한다. 여실히 감지하고 있지만 어떠한 정치력으로도 이행하지 못하는 “행동의 마비” 상태, “불안, 죄의식, 무력감”에 빠져있는 자들을 향해 ‘생태계급’으로 일어날 것을 요청한다. ‘의지의 개인주체’가 까마득히 간과해왔던, 생태계에 함께 거주하는 ‘지구생활자들’과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티브이엔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전환적인 ‘연대’는 수저의 색깔을 뛰어넘는 두 고교생을 통해 생성된다. 삶을 지배하는 것이 물질도, 서로를 향한 적대감도, 역사적 트라우마도 아니길 바라며, 그저 ‘향유하는 삶’을 위해,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는 서로를 지지하는 친구, 서로의 수호천사가 되어 어른들의 배배 꼬인 세계와 과감히 단절하고 떠난다. 물론, 그들의 새로운 시작은 어른들이 어둠의 경로로 축적한 비자금으로 가능하다. 어떤 과거, 어떤 사물, 광물, 동식물 행위자들과 삶의 연결망을 재조립하게 될지는 앞으로 그들의 여정이 말해줄 테다.
돌아서면 들리는 ‘선진국’ 운운에 다시 드라마 속 대화를 떠올린다. 인주는 화영이 준 명품구두를 신고 신이 나서 묻는다. “언니, 나 무심하게 부유해 보이지 않아? 가정교육 잘 받고 자란 것 같지?” 그러자 화영은 “여기가 쭈그러들었잖아!”라며 인주의 어깨에서 숨길 수 없는 ‘구김살’을 집어낸다. 우리 몸에 새겨진 그런 상흔은 ‘선진국’이라 적은 종이를 붙여서가 아니라, 떼어내면서 지워나갈 수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