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보육원에서는 엄마가 여러명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준 양육자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양육자(엄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새해가 되면 하루아침에 다른 생활반 아이들의 엄마가 됐다. 내가 엄마라고 믿었던 양육자는 떠나고, 새로운 엄마를 바로 맞이했다. 처음으로 엄마가 바뀐 날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엉엉 울었다. 아무리 목청이 떠나가도록 울어도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떠나는 게 가슴이 사무치도록 슬펐지만, 몇번 양육자가 바뀌니 익숙해져 갔다. 나를 키웠던 양육자는 다른 반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다른 반 양육자가 새로 엄마가 돼 오기도 했다. 그런 게 보육원 생활이었고, 그렇게 남들과 다른 가족이 시작됐다.
보육원에서 19년을 사는 동안 거쳐 간 양육자는 16명이었다. 1~2년이 지나면 양육자가 어차피 나를 떠나갈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양육자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없었고,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밀어냈다. 매년 바뀌는 양육자에게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양육자 성향에 따라 생활반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했고, 그 분위기에 잘 적응하는 것은 한해를 잘 지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새해 초 양육자가 바뀔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보육원 생활에서 변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같은 반에서 함께 지낸 언니, 동생들이었다. 해가 바뀌면 양육자는 바뀌었지만, 우리는 같은 생활반에서 계속 함께 지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해마다 바뀌는 양육자보다 서로에게 더 강한 애착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며 쌓아온 그런 애착과 유대감을 우리는 ‘보육원정’이라고 불렀다. 보육원에서 만났지만 보육원정을 쌓았기에, 진짜 가족들처럼 연결된 사이가 됐다고 말이다. 보육원정을 쌓은 우리는 서로를 더 끈끈하게 결속시키기 위해 언니, 동생이 되자고 하기도 했다. 그러면 진짜 친언니, 진짜 친동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연결은 참 신기했다. 언니나 동생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서로 기꺼이 도왔다. 그리고 생일을 더 각별히 챙겨주거나 자신에게 필요 없어진 물건을 물려주고 물려받아 사용하기도 했다. 그 정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대단했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보육원에서 퇴소한 뒤에도 힘들 때면 보육원정을 쌓은 언니들에게 연락해 만났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걱정하고 살핀다. 그때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태기도 하고 나누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도움을 청한 것도, 그리고 또 도움을 준 것도 그때 보육원정으로 연결된 언니, 동생들이었다. 우리를 가족이 아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혈연이 아니어도 우리는 충분히 진하다.
보육원을 퇴소하고 나서는 사회에서 만나 ‘사회정’을 쌓은 친구들도 있다. 이들 또한 나를 살피고, 나도 그들을 살핀다. 이 친구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에이, 우리 정도면 가족이지.’ 그 말이 참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혈연을 넘은 가족, 서로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가족. 자립 뒤 외롭고 공허하던 시기,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은 보육원정 친구들과 사회정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으로 나는 자립할 수 있었고 자립해 산다.
자립준비청년에게는 ‘우리가 너를 들여다볼게’ 하고 마음으로 이야기해줄 사회정으로 연결된 가족이 더 많이 필요하다. 가까이에서 그들의 자립을 응원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줄 사람들, 그리고 멀리 있어도 따듯한 시선으로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누군가의 관심과 살핌이 오늘도 자립하고 있는 또다른 ‘열여덟 어른’에게 힘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