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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검찰 정권’은 끝내 평화의 장성을 허물려는가

등록 2022-12-12 18:58수정 2022-12-13 10:56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일 오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일 오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편집국에서] 길윤형 | 국제부장

조선 선조 때 태어나 인조반정 직후 처형된 박엽(1570~1623)은 살벌한 명·청 교체기에 평안도에서만 10여년 장기 근무하는 등 ‘북방 전문가’로 특이한 이력을 쌓은 인물이다. 광해군 정권 때 의주부윤과 평안도관찰사 등으로 재직하며 여러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저서 <최명길 평전>에서 박엽에 대해 사람됨이 사납고 엄격하여 “재직 시에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 했”고 “광해군에게 항상 뇌물을 바쳐 신임을 얻었다”는 당대인들의 평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 교수가 책의 적잖은 분량으로 이 인물의 ‘운명’을 소개한 것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나라를 구해낸 최명길(1586~1647)이 남긴 평가 때문이다.

1623년 4월 반정에 성공한 뒤 최명길은 원훈 김류에게 편지를 보내 ‘광해군 사람’인 박엽의 구명을 요청했다. “제가 생각건대 장차 우리나라에 닥칠 병란으로는 북쪽 오랑캐가 가장 걱정스럽습니다. 천기를 살피면 이처럼 장수의 지략을 지닌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대감께서 만약 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대감의 손으로 우리나라의 장성(長城)을 허무는 것이니 만일 북쪽 오랑캐가 달려 내려온다면 누가 그것을 막겠습니까. 반드시 후회하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박엽은 1619년 9월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인조반정 직후 처형되기까지 3년6개월을 재직했다. 그가 관찰사직을 맡은 것은 강홍립의 1만3천 조선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 궤멸된 직후였다. 나라가 휘청거린 위기에서 박엽은 사실상 조선의 대후금 외교의 ‘전권’을 쥐고 큰 탈 없이 서북방 변경의 안정을 유지했다. 이를 지켜본 최명길이 박엽이 지닌 후금과의 교섭 능력과, 첩자와 재물을 활용해 구축·유지해온 외교통로 등을 아깝게 생각한 것이다.

당대 정권의 판단은 달랐다. 김류는 박엽이 광해군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므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봤다. 그가 처형되자 원한을 품었던 이들이 관을 부수고 주검을 꺼내 토막 냈다.

시간이 흘러 최명길의 우려가 현실화됐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1636년 최명길은 재차 편지를 보내 낙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박엽이 살아 있었더라면, 정묘호란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이런 우환도 없었을 것입니다.”

윤석열-한동훈의 검찰 정권이 9일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구속 기소했다. 공무원 이대준씨가 북한군에 피살된 사실이 알려질 경우 남북 화해협력을 강조하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이 커질 것을 우려해 이 사태를 ‘자진 월북’으로 정리하고 보도자료 등을 만들어 돌렸다는 이유다.

문득, 2018년 4월27일 판문점의 광경이 눈에 그려진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꿈꿨던 ‘판문점 선언’이 타결되는 순간 서훈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복잡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안경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책 <하노이의 길>(2022)에서 그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별 직책 없이 아내와 함께 서울 청계천 변에서 작은 와플 가게를 운영했다”고 썼다. 검찰 말이 다 맞다 해도 서 전 실장이 그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지 알 수 없다. 형사 처벌이 아닌 정치적 비판으로 족하지 않은가.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통치행위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망망대해에서 국가의 침로를 정하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각각의 정부가 절박한 상황과 한정된 정보 속에서 고심 끝에 판단하고, 이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책 추진에 도움 되는 쪽으로 해석했다고 처벌하면 역대 정부 담당자들의 반 이상은 쇠고랑을 차야 한다. 외교 행위의 절반 이상은 안타깝게도 벌어진 현상과 내려진 결정을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해 설명하는 ‘분식’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전임 정권의 과도한 대응(합의를 주도한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큰 고초를 겪었다)으로 한-일 관계는 파탄 났고, 그 후과가 아직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 서 전 실장의 처벌은 남북 관계와 한-중 관계 등에 몇배나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하노이 파국’ 이후 우린 길을 잃었고, 이를 만회하려던 이 앞에 엉뚱한 ‘망나니’가 칼춤을 추고 있다. 서 전 실장에게 잘못이 있다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검찰 정권은 겸손해야 한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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