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에는 취약한 금융중개 기능, 가계부채 위험, 관치금융과 낙하산, 불투명한 지배구조, 취약한 내부통제와 소비자 보호 등 다양한 후진성이 존재한다. 교수들이 올해 한국 사회를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라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로 표현했다는데, 마치 한국 금융을 나무라는 말 같다. 계묘년 새해 금융권의 분발을 기대한다.
윤석헌 | 전 금융감독원장
힘들었던 임인년도 어느새 막바지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 변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공급망 붕괴, 대선과 정권교체, 태풍 피해, 이태원 참사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그러나 금융권에는 현재의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에도 내년도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그러니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선각자 말처럼, 오히려 지금은 기본에 충실해야겠다. 이에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몇가지 살펴본다.
지난 반세기 한국 금융은 경제성장에 힘입어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실물자산 대비 금융자산의 배수를 나타내는 금융연관비율(금융자산/명목 국민총소득(GNI))이 1975년 2.6배에서 2021년 3분기는 11배로 빠르게 상승했다. 미국과 일본에는 못 미치나 유럽 국가들과는 견줄 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의 양적 성장이 금융선진화를 의미하지는 않아서 한국 금융에는 취약한 금융중개 기능, 가계부채 위험, 관치금융과 낙하산, 불투명한 지배구조, 취약한 내부통제와 소비자 보호 등 다양한 후진성이 존재한다. 최근 경제의 디지털화 추세 속에 금융혁신을 기대하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국 금융의 후진성은 금융사의 규모 위주 경영과 점유율 경쟁에서 드러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경쟁은 당연하나, 지나치면 금융사 본연의 중개 기능 수행보다 수익 창출에 치우쳐 고객 니즈 충족에 실패하거나 고객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그간 규모 위주 경영은 은행의 예대 업무가 주도했다. 대부분의 예금금리가 규제와 경쟁으로 정해지고 대출은 초과수요로 담보 요구가 가능한 터라 은행 이자이익은 예대 업무 규모가 커지면서 확대되었다. 세칭 천수답 경영이 가능했는데, 오늘날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을 지우는 가계부채 확대에 기여했다.
또 다른 후진성은 금융사가 고객에게 위험을 떠넘기는 것으로, 수수료 수취방식에서 드러난다. 금융사는 투자·보험 상품 판매 때 수수료를 선취하는데, 그로 인해 모든 위험이 고객에게 전가된다. 사모펀드 사태가 비근한 예다. 2015년 이후 사모펀드 판매 확대 과정에서도 ‘위험관리 전문가’인 은행은 판매수수료를 선취하여 위험에서 면역되었고 모든 위험은 비전문가인 고객에게 전가됐다. 은행은 위험부담이 없으니 판매를 확대해 수수료 수익을 불렸지만 고객은 판매 확대로 커진 위험을 모두 떠안게 되었다. 결국 2019년 중반 이후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가 불거졌고 대규모 투자자 손실이 발생했다.
한국 금융 후진성의 근저에는 관치금융 유산이 깔려 있다. ‘관은 치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관치금융은 오랫동안 한국 금융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물론 깨지기 쉬운 금융산업의 속성상 관치가 필요한 때도 있다. 특히 한국은 소규모 개방경제로 외환위기 가능성이 상존하고 경제가 단기간에 고속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책금융 등 관의 보완적인 역할도 필요했다. 지난 9월28일 레고랜드 사태 발생 직후 채권시장에서 모든 채권의 신인도가 뿌리째 흔들렸을 때, 정부가 ‘50조원+α’의 지원안으로 불끄기에 나섰던 것은 불가피한 개입이었다. 한편 최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 속에 금융당국이 금융권의 예금금리 인상 자제를 촉구한 것은 예금 고객의 이자소득으로 금융사 비용 절감을 지원한 시장 왜곡이었다.
관치금융에 문제가 많지만 특히 무책임과 낙하산을 꼽을 수 있다. 우선 관료들은 정책결정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전통이 있는데, 신뢰를 중시하는 금융과 조화되지 않는다. 지난 8월 말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의 론스타사건 재판부는 한국 정부에 2925억원 배상 책임을 판정했는데, 추후 확정 때 지연이자까지 합쳐 4000억원가량의 배상 책임이 예상된다. 그런데도 애초 금융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직접 담당했고 윤석열 정부에서 경제부총리, 금융위원장 등으로 복귀한 모피아(재경부 관료+마피아)들은 이번 판정에 별다른 책임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궁금하다. 이밖에도 카드 사태, 저축은행 사태 그리고 최근의 레고랜드 사태까지 정부 정책이 국가에 끼친 손실에 눈감는 전통은 한국 금융의 후진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상황에서 수일 전 ‘사모펀드 사태로 인한 고객 피해를 총체적으로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는 신한지주 조용병 회장의 용퇴 발표가 신선한 대조를 이룬다.
모피아들은 퇴직 뒤 관련 업계에 두세번 이상 낙하산으로 내려가고 회전문으로 돌아 들어가는데, 이런 인사 관행이 지속되면서 한국 금융 경쟁력이 저하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관료의 행정능력이 더는 금융 전문성을 대체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낙하산 인사가 금융사 직원들 사기를 낮추는 까닭이다. 아이비케이(IBK)기업은행의 경우, 3년 전 낙하산 행장이 노조와 한달 가까이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제 다시 전 금융감독원장 등 모피아들이 후임으로 거론된다. 축구 경기의 심판이 선수로 뛰겠다는 격이다. 공직자윤리법 제17조는 금감원 임직원의 퇴직 후 3년 이내 금융권 취업을 제한한다. 다만 아이비케이는 기타공공기관으로 예외 인정을 받는데, 아이비케이 업무가 시중은행과 경쟁 관계에 있어 설득력이 낮다. 특히 금감원 입장에서는 임직원의 금융권 취업을 막으면서 전임 원장의 은행 취업을 허용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 금융의 또 다른 후진성은 금융지주사 운영에서 드러난다. 이 제도는 금융권 구조조정 수단으로 2001년 도입되어 국내 금융의 엄격한 겸영규제 우회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금융권의 규모 확대와 수익 창출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근 그 성과에 의문이 제기되는데, 다양한 금융 수요 충족에 기여하기보다 정치권이 관치금융의 틈새를 파고들어 지주회장의 참호 구축 또는 파워 확대를 가능하게 했다는 비판이다. 특히 ‘엠비(MB) 정부 4대 천왕’ 이후 지주회장의 권한이 책임을 능가했다는 평가다. 지주회장이 연임과 재연임을 거치면서 잠재적 경쟁자들은 기회가 봉쇄되고 인맥과 줄서기가 실력과 업무성과를 대체한다는 것으로, 이사회 운영의 투명성 제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업 경쟁 기조가 규모 위주 경영과 시장점유율 경쟁을 벗어나 고객서비스 충실화로 방향전환하기 위해서는 감독 강화, 내부통제 강화 및 규제 완화가 순서대로 필요하다. 금융권이 규제 완화를 바란다면 먼저 감독 강화를 수용하여 위험관리 역량을 제고하고 내부통제 체제를 마련해 소비자 보호 강화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금융환경 속에서 금융사는 책임지는 혁신으로 금융의 선진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1일 교수들이 올해 한국 사회를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라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로 표현했다는데, 마치 한국 금융을 나무라는 말 같다.
계묘년 새해 금융권의 분발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