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자폐는 한때 가장 절망적인 질병으로 여겨졌다. 자녀가 자폐란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부모는 두가지 조언을 들었다. 첫째, 아이를 수용기관에 보낼 것. 둘째, 빨리 잊고 새 출발 할 것. 오늘날 자폐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졌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하며, 자폐란 저주받은 질병이 아니라 그런 다양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신경다양성 이론이다. 장애와 인간을 분리해서 바라보고, 자폐인의 존재를 긍정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종의 다양성을 축복하는 열린 사고방식이다.
사고의 혁명적 전환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양심적 과학자, 의사, 교육자, 법률가, 언론인, 정치인,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혐오와 편견의 벽을 무너뜨린 가장 큰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면, 자폐인 당사자와 가족의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자폐 공동체는 일찍부터 대규모 조직을 일궈 투쟁과 교육과 지원에 힘쓰는 한편,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기적의 힘은 당사자성과 연대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분이 많은 줄 너무 잘 알지만, 자폐의 역사를 되짚다보면 정신장애 가족으로서 일말의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정신장애인과 가족은 편견에 맞서 싸우고, 사회적 인식과 조건을 개선하고, 당사자와 가족에게 필요한 교육과 지원을 제공할 조직을 아직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의사들은 조현병과 양극성장애 등 주요정신질환을 “평등한 병”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질병이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계층에 많지만, 주요정신질환은 어떤 계층에서든 비교적 고른 유병률을 보인다. 쉽게 말해 조현병 가족 중에는 유력한 정치인, 부유한 기업가, 실력 있는 의사, 덕망 있는 학자,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타가 얼마든지 있다. 왜 이들은 힘을 합쳐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1977년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두 여성이 만났다. 조현병을 겪는 아들을 둔 엄마들이었다. 언론은 물론 학술 논문에조차 “조현병을 일으키는 엄마”라는 표현을 버젓이 쓰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점심을 먹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야만적 관행에 저항할 방법을 논의했다. 한가지는 분명했다. 둘만의 힘으로는 어림없다는 것. 알음알음 열두명을 모았다. 알고 보니 다른 주에도 비슷한 소규모 조직들이 있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다. 마침내 2년 뒤 엄마들은 각 조직의 대표들끼리 전국 모임을 열기로 했다. 기껏 50명 정도 오리라 예상했던 행사에 무려 284명이 참여했다. 멀리 캐나다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전미정신질환연맹(National Alliance on Mental Illness, NAMI)의 탄생이다. 연맹은 지금까지도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과 가족들을 옹호하고, 교육과 지원을 제공하고,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정치적인 영향력도 막강하다. 무엇보다 고립된 채 병마와 차별이라는 이중의 적과 싸워야 하는 환자와 가족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돼준다. 우리나라에 아직 이런 조직이 없다는 것은 편견과 낙인의 문화가 그만큼 강고하다는 방증이다.
정신질환은 뇌의 병이다. 암이나 고혈압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듯, 뇌라는 장기에 병이 생긴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이토록 당연한 이치조차 혼자 외치기란 쉽지 않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려면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결어야 한다. 문제는 뜻을 같이할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한사코 꼭꼭 숨기기 때문이다. 그 그늘 속에서 수치와 편견이 자란다. 두려움을 떨치고 몸을 일으켜 빛 속으로 걸어 나와야 한다. 큰소리로 외쳐 서로 불러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연대에서 나온다. 그 연대의 전제조건이 드러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