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치 <한겨레> 1면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숨&결]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빈자리가 채워진 그 가족사진은 몇가지 생각을 불러왔다.
하나는 이 신문에서 보았던 또 한장의 가족사진이다. 아주 오래전, 첫눈 오고 동지를 지난 이맘때였을 것이다. 어느 여자대학 입학시험 발표가 나던 날, 벽보를 보고 합격의 기쁨을 나누는 사람들 반대편으로 아버지가 고개를 떨군 딸의 어깨를 감싼 채 학교를 빠져나가는 뒷모습, 그 긴 그림자가 교정에 가득했던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왜 이 사진이 떠올랐는지, 내 기억이 ‘슬픔’이라는 묶음으로 이 사진을 연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내 아버지 기일의 풍경이다.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보다 먼저 떠났다. 내가 제대하고 여기저기 취직시험을 보던 20대의 가을에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눈물짓던 생각이 난다. 자식들로부터 따뜻한 밥 한그릇 못 얻어 자시고 떠난 아버지를 나는 산에 묻었고, 조부는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몫을 다하지 않고 떠났으므로 장손인 나는 상주를 네번 해야 했다. 상주 한번에 10년은 늙는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총각 때부터 내 별명은 ‘영감’이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모는 제사 때마다 일찍 오셔서 상에 올릴 나물을 챙겨주시곤 했는데, 내가 퇴근하고 아파트 현관에 들어설 때 꼭 한 말씀 하셨다. “아야, 나 느그 아부지 온지 알었다”, 굽은 허리로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면서 하는 그 말, 이따가 흠향 때 오실 아버지가 벌써 왔을 리 만무하건만, 고모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 무렵이 내가 아버지의 향년을 지나는 나이였을 것이다. 도토리가 자라 참나무가 되듯이 생김생김하며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영락없이 닮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망자는 더 늙지 않으므로 고모의 기억 속에 그는 내 나이에 멈춰 있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꼬부랑 할머니가 된 고모가 나를 ‘오빠’라고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 가족사진은 한달쯤 전 아침신문에 실린 사진이다. 세월호 참사 때 열여덟 나이로 떠난 고등학생이 여덟살을 더 먹고 어엿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부모와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아들, 말끔하게 잘 나왔네, 그래서 더 보여주고 싶구나’라고 말하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신문을 몇장 넘기면 5·18 때 다방에서 일하다가 총에 맞아 서른에 떠난 청년이, 백발노인이 되어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나온다. 그리고 성수대교 참사 때 31살에 떠난 형, 용산참사 때 58살에 떠난 남편, 삼풍백화점 참사 때 열아홉에 떠난 딸, 산업재해로 열일곱에 떠난 동생이 지금의 모습으로 되살아나 함께 찍은 가족사진들이 실려 있다. 다들 에이아이(AI)가 살려냈다고 한다. 며칠 뒤 신문에는 이태원 희생자들의 사연들이 뜨문뜨문 이어진다.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하나하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은 무엇인지 기록’하는 이 난은 은행 시험에 합격했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영안실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시퍼런 청춘들, 못다 이룬 그들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겨레>가 슬픔을 잘 어루만지고 있다. 어느 집이나 대하소설을 쓸 만한 애절한 사연이 없는 집이 있을까마는 여러 사람이 죽은 사회적 참사를 잊지 않고 위무하는 방식이 진득하고, 따뜻하다. 슬픔은 단박에 극복되는 것이 아니어서 술보다는 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은은하게 우러나는 오미자의 불그레한 색 같기도 하고, 신산한 삶처럼 신맛이 강한 것도 그렇다. 그 가족사진은 정지된 기억의 물꼬를 터줄 것이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물길을 터주면 그 길을 따라 흐르듯이, 그날 멈춰버린 시간이 지금 우리 곁으로 흘러 내려와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것 같다. 빈자리가 없는 가족사진은 다감하여, 눈가에 눈물보다 입가에 웃음이 먼저 나오게 한다. 오미자 씨앗을 오물오물 물고 있으면 시고, 쓰고 매운 듯하다가, 뒤에 단맛이 나는 것처럼, 그 사진들이 그렇다. 우리 고모가 좋아할, 나도 늙은 아버지 사진을 한장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