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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현석의 팔레트] 관광

등록 2023-01-15 18:39수정 2023-01-16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앞만 보고 달리다 세차게 넘어진 연말이었다. 봄이 잘못 도착한 지난주에 친구와 바닷가에 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을 지나 농가를 개조한 숙소에 들어서니 고양이가 마중 나왔다. 짐을 풀지 않은 채 고양이와 놀다 간식을 사오겠노라 약속하고서 숙소에 있는 자전거 두대에 몸을 실었다.

논길을 따라 20분을 달리면 바다였다. 아래로 완만한 경사는 너무 완만해 가볍게 밟히는 페달로만 느껴졌다. 땔감을 실은 트럭이 이따금 뒤에서 다가왔다. 우리는 옆으로 붙어 트럭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다시 페달을 밟았다. 기모 안감과 가슴팍 사이에 땀이 맺힐 때쯤 파도가 보였다.

여름내 북적였을 해변은 적막했다. 사람 무게에도 차가운 모래는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파도가 멀리서부터 켜켜이 밀려왔다. 우리는 포말로 부서져 해안에 닿는 자리까지 걸어갔다가 뒷걸음질쳤다. 뒷걸음질친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밀려왔다 돌아가는 물처럼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들에 관해서. 우리가 공유하는 그늘은 한편으론 같고 한편으론 달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만큼 이해 못 할 부분도 많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그늘을 담담히 나눌 사람이 있어 다만 감사했다.

해변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마당에서 새우를 흔들었다. 고양이는 경계심 없이 새우를 낚아챘다. 오물거리는 작은 입에 흐뭇해졌다. 너는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구나, 생각하면서 농가로 들어갔다. 친구가 칵테일을 만들었고 종일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또 이야기를 했다. 스스로를 아끼자고, 나를 낭비하지 말자고, 여유를 가지자고, 힘들어도 직면하자고. 뻔하디뻔한 말이었지만 필요한 말이기도 해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챙겨온 시집들이 생각났다. 받기만 하고 읽지 못한 책들이었다. 여유가 생기면 읽겠다고 미루어뒀으나 여유는 만들지 않는 한 생기지 않았다. 쥐고 있던 것들을 버리니 눈에 밟히는 게 있었고 시집도 그중 하나였다. 가방에서 시집 두권을 꺼냈다. 나보다 시를 더 좋아하는 친구가 시집을 살피다 이런 걸 해보자고 했다.

눈을 감는다, 점을 치듯이. 책을 펼친다, 상대방을 생각하며. 펼친 시를 낭독한다, 듣는 이에게 선물하듯이. 마치 신이 하는 주사위 놀이에 우정을 시험하는 것처럼, 눈을 감은 친구가 두권 중 하나를 골라 아무 곳을 펼쳤고 나는 귀 기울였다. 시는 거짓말처럼 그날 하루와 닮아 있었다. 개 한마리와 사람 두명이 등장하는 시였다. 섬으로 여행을 떠난 셋은 해저터널을 지나 섬에 도착한다. 언덕을 오르고, 절벽 위 해안도로를 달리고, 풀숲을 걷다 컹컹 짖는 개의 꼬리 너머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를 본다.

낭독자와 청자 모두 기막힌 우연에 꺽꺽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시집을 돌려받은 나는 친구가 점지한 시를 다시 읽었다. 귀로 듣는 동안 명치를 건드린 문장을 눈으로도 읽고 싶어서였다.

“바깥은 천지가 어둠이라 창문에 비친 우리의 얼굴만 봐야 했어/ 밖이 정말 바다야?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어? 보이지 않아도 믿지 않아도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캄캄한 창문에는 두 개의 이목구비만 떠다니고”(김리윤 ‘관광’, <투명도 혼합 공간> 수록)

보이지 않아도 믿지 않아도 존재하는 게 있다는 사실보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어두운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보는 마음. 그 마음이 이상하게 좋았다. 몇편의 시를 번갈아 읽다 보니 밤이 깊었다. 시와 시 사이에 대화가 깃들었고, 뻔하디뻔한 말이지만 필요한 말을 간간이 외며 슬레이트 지붕 아래 둥지를 튼 참새가 발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새해 첫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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