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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정략적 고려에 다시 밀린 ‘비동의 강간죄’

등록 2023-01-29 15:20수정 2023-01-30 11:30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성범죄 처벌을 규정한 제32장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법이 보호해야 할 가치를 ‘정조’에 둔 것이다. ‘정조에 관한 죄’가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뀐 것은 1995년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법조문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전히 배제돼 있다.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정한다. 현행법에서 성범죄가 인정되려면 피해자가 심한 폭행 또는 협박을 당해야 하고,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피해자의 항거 여부에 따라 죄의 경중이 결정돼 결국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판이 나온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음주·약물 상태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나 권력관계에 의한 성폭력 등은 강간죄로 인정받기 쉽지 않다.

특히 2018년 한국 사회를 휩쓴 미투 운동은 성범죄가 물리적 강제력뿐 아니라 권력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소속 66개 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폭행 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경우가 71.4%(735건)에 이르렀다. 법원은 폭행·협박 판단 기준을 완화하는 추세지만, 저항이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최협의설’(법조문을 가장 좁게 해석하는 것)을 적용하는 경우도 여전하다. 비서를 성폭행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1심에서 “위력 행사의 정황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받았다.

비동의 강간(간음)죄는 강간죄의 기본 요건인 폭행·협박을 ‘동의 여부’로 대체하는 것이다. 처벌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취지로, 여성인권단체의 오랜 숙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논의할 공론의 장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20대 국회에서 비동의 강간죄를 담은 형법 개정안 10건이 발의됐으나 모두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각각 발의했는데, 여야의 무관심 속에 지금껏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방치’돼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6일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비동의 강간죄 추진 계획을 밝혔다가, 법무부와 여당의 반대에 9시간 만에 입장을 철회했다. 여성 인권은 또다시 정략적 고려에 밀려나고 있다.

최혜정 논설위원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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