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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열린편집위원의 눈] 절차와 사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등록 2023-02-05 18:16수정 2023-09-21 18:12

이소희 ㅣ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

정의를 지향하는 공동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그는 선배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다. 바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대리인을 지정하고 몇번의 조사와 소통 뒤 가해자 징계가 이뤄졌다. 공동체도, 가해자도, 그도 해치우듯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 시간을 덮었다. 몇년이 흐른 뒤에야 그는 겪었던 시간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많이 울었고, 많이 말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또 몇년이 흐른 뒤 그는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속했던 공동체의 해결 과정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많이 질문하고, 많이 들었다. 성폭력 사건 해결은 ‘절차’ 이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공유된 기억’을 만드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해를 알린 뒤 모든 것이 절차대로 마무리되었다. 가해자는 활동 반경 제한을 수용하고, 사과문을 쓰고, 재발 방지 교육을 들었다. 하지만 피해자, 가해자, 대책위원회 말고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공유된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그 시간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었다. 무너진 신뢰는 절차와 사과만으로 회복되는 게 아니었다. 깨진 신뢰는 “공동체 안에서 과거와는 다른 관계의 질서가 모색될 때에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과거와 다른 주체가 되어갈 때에만 재구축될 수 있었다. 신뢰의 재구축은 공동체의 재구축이기도 하다.”(2012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토론회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발제Ⅰ ‘공동체 성폭력 ‘이후’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다’ 전희경) 공동체를 재구축하는 것은 굳게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조직에서는 사건을 모른 척하거나, 절차대로 했으니 문제없다고 하거나, 가해자 징계로 종결한다.

신뢰의 재구축, 공동체의 재구축은 구성원들과 ‘공유된 기억’을 만들고자 할 때 가능해진다. ‘공유된 기억’이 있어야 사건을 말할 수 있고 그다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1월6일 한겨레신문은 신문사 편집국 간부 한명이 2019년 당시 타사 기자였던 김만배씨와 금전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하며 독자들께 사과했다. 1월9일 대장동 의혹의 핵심 인물인 김만배씨와 금전거래를 한 전 편집국 간부의 해고와 책임을 통감한 대표이사·편집국장의 사퇴를 알렸다. 1월20일치 지면 2면에 ‘편집국 간부의 김만배 사건 관련 진상조사위원회’의 중간 경과보고를 실었다. 이러한 과정을 목격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숨기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원칙에 기반하여 사실과 판단을 지면에 싣는 과정은 한겨레신문 구성원과 독자와 시민들과 ‘공유된 기억’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구성원들은 많이 울고, 많이 이야기하고, 많이 질문하고, 많이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인터넷포털 사이트에 ‘한겨레, 김만배’ 키워드를 쓰면 기사들이 쏟아진다. 이 사건을 다루는 다양한 언론사도 외부자로서만 기사를 쓰는 게 아니라 언론인의 책무를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반복되는 요즘이다. 그래도 ‘언론사들은 다 똑같아’라며 냉소하지 않고 언론이 세상을 직시하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이 될 수 있도록 변화의 목격자가 되고자 하는 독자와 시민들이 곳곳에 있다고 믿는다.

신뢰는 관계와 공동체와 세상을 지키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뢰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애를 쓰는 감각이 무뎌지면 신뢰는 순간 무너진다. 붕괴한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유된 기억’으로 쌓은 신뢰는 더 단단할 것이다.

※‘열린편집위원의 눈’은 열린편집위원 8명이 번갈아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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