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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 세계의 틈새

등록 2023-02-12 18:31수정 2023-02-13 02:34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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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얼마 전 읍내 아파트에서 시골 마을로 이사하고 이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마을에 인사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얄지 아무것도 몰라서요.” “그렇잖어두 부녀회장이랑 어째야쓰까 우덜끼리 야그했당게. 오늘은 인자 우덜 둘이라두 가봐야쓸꺼나 우짤꺼나.”

마을에 입주하고 인사가 없으면 아무래도 뒷말이 나오는데, 그렇다고 뭘 하라고 하자니 부담주는 것 같아 이장님과 부녀회장님이 걱정이셨단다. 우리보다 먼저 이사 온 몇집은 뷔페를 불러 입택 잔치를 했단다. 우리 마을엔 70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인사에 못 잡아도 300만원은 든단 얘기에 가슴이 철렁한 찰나, 부녀회장님이 이장님 말씀을 툭 끊었다.

“부페 불러불믄 시상 편해불긴 헌디, 돈이 너무 많이 등께, 걍 우리가 해줄라네.”

같이 계시던 부녀회 총무님이 거드신다.

“그려, 한참 바쁠 때믄 못해주는디, 겨울이라 바쁠 일 없응께 우덜이 장 봐다 해줄랑게.”

이장님이 놀라신다. “그려? 부녀회서 이 집은 특별 대우를 해줄랑갑네.”

하루 전날 떡 맞추고, 장 보고, 음식 밑준비를 해야 하니까 이틀짜리 일이다. 날을 잡느라 서로 시간을 맞추는 중에 부녀회장님이 깔끔하게 정리해버리신다.

“집이 바쁜 거 다 앙께, 전날두 올 필요 읎어. 당일 아침에나 일찍 나오믄 써. 우리가 장 보고 영수증 줄텡께 그건 이장님하고 정리하시고.”

나는 도무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어? 그건 너무 날로 먹는 건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

부녀회장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의논이 마무리되었다.

“아재(옆지기)가 우리헌티는 좋은 사람으로 콱 박혀부렀어. 집이가 안 이뻐불믄, 억만금을 준다고 우리가 해준당가. 인자 잘이나 살믄 되제.”

입택 잔치 당일 아침. 이장님이 마을 방송을 하신다. “에~ 긍께, 우리 마을에 터 잡고 집을 짓기 시작헌 ○○○ 씨, ○○○ 씨 내외가, 7년잉가 8년잉가, 암튼 7, 8년만에 드디어 입택을 했습니다아. 다 아시지라? 그려서 오늘 부녀회 협조를 받어 마을 분덜께 점심을 대접한답니다. 한 분도 빠짐읎이 마을회관으로 오셔서 입택을 축하해주시길 바랍니다아.”

농사 짓고 집 짓느라 마을을 들락거리며 8년을 지내는 동안, 마을에 일이 있으면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으레 여자들 일이라고 치는 일까지도 유일하게 함께 한 남자가 옆지기였다더니, 그래서 예쁘게 보인 덕일까? 이제 마을 행사가 있어도 부녀회가 손수 장 봐다 요리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가장 큰 마을 행사인 어버이날 잔치도 뷔페를 부른지 오래됐다고.

우리가 받은 이 특별 대우를 어떤 사람은 운이라, 어떤 사람은 우리가 애써온 보람이라 한다. 어쩌다 생긴 이런 일로 마을 문화가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이 세계의 틈새를 본 것만 같다. 자연법칙처럼 거스를 수 없는 ‘돈으로 다 된다는 세상’에서 ‘돈으로 안 되는 일’, ‘돈 없이 되는 일’들이 가느다란 빛처럼 새어 나오는 작은 틈새. 이런 틈새는 뜻밖에 아주 작은 노력으로도 열릴 때가 있다. 우연이 인연이 되는 낯선 이에 대한 환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미력한 연대, 때때로 누군가에게 기꺼이 보탠 일손, 대가 없이 나눈 지식이나 정보 같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 충만했던 시절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던 호기는 꺾인 지 오래다. 그러나 틈새는 균열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너희의 세계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너나 할 것 없이 취약한 우리가 서로 기대고 돌보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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