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2화 노무현 승리의 의미
그렇고 그런, 늘 보던,
약삭빠른 정치인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노무현에 걸었던 수많은 민초들이 있었다.
그런 민초들이
썩어빠진 정치판을 한번 바꿔보자는
염원으로 결집한 힘이
2002년 대선 승리를 이룬 것이다.
제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것은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나는 사전투표를 해놓고 선거 날인 2002년 12월19일 일본 교토에 가 있었다. 교토대와 경북대 경제학부가 오래전부터 해오던 공동세미나 참석차 교토대에 간 것이다. 하루 종일 논문 발표와 토론을 마치고 양국 교수들이 식당으로 옮겨갔을 때 마침 저녁 6시 티브이 뉴스가 나왔다. 첫 뉴스로 출구조사에 기초해서 노무현 당선을 예측하는 자막이 크게 떴다. 순간 교토대 교수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교토대 경제학부는 일본 진보경제학의 메카답게 이회창보다는 노무현을 좋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나는 노무현 후보를 2002년 8월에 두 번, 그리고 9월에 한 번, 도합 세 차례 만났고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 무렵 한국경제학회 창립 50돌 기념 학술대회에 논문을 발표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일생일대의 논문 쓰는 데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초 열린 학술대회에서 내가 논문을 발표할 때 청중석 맨 앞자리에는 한국경제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던, 말로만 듣던 연세대 최호진 교수가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서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이 논문 쓰느라 바빠 노무현 후보를 도우려야 도울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가끔 공약으로 쓸만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 노무현 캠프에서 일하던 조재희 박사에게 전화나 이메일로 전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선거 전날 밤 일본 교토의 호텔로 조재희 박사의 다급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정몽준이 조금 전 배신해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이 일을 어떡하나. 선거에 이기긴 어렵겠구나 싶었다.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 오후 6시 첫 뉴스에 ‘노무현 당선 예상’으로 뜨니 그 기쁨은 더욱 컸고, 감개무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선거본부를 지휘했던 정대철 고문에게서 나중에 들은 그날의 비화는 이러하다. 선거 전날 밤 정몽준이 변심한 뒤 노무현 캠프에서는 정몽준을 만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선거본부는 초상집 분위기가 됐다. 내일 선거는 보나 마나 졌구나 이런 분위기였으리라. 정대철 고문이 노무현 후보의 손목을 잡아끌다시피 해서 정몽준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출발한 자동차가 이화여대 앞에 이르자 노 후보가 갑자기 안 가겠다고 우겼다. 그런 후보를 계속 설득해서 억지로 평창동의 집까지 가긴 갔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정몽준의 집 앞에서 노 후보가 문전박대 당하는 한 장의 사진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고 아마 다음날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정몽준의 배신은 노무현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간만사는 새옹지마라는 말이 떠오른다. 막판 돌발 변수 없이 선거를 치렀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믿었던 동지의 배신이라니. 그것도 선거 전날 밤에. 이런 충격이 젊은이들을 대거 투표장으로 나오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의리를 중시하고 배신자를 싫어한다. 신숙주가 성삼문을 배신한 것은 아니고 원래 수양대군과 가까운 사이였고 그래서 출세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신숙주를 배신자라고 욕한다. 심지어 이광수는 소설 <단종애사>에서 병을 앓다가 죽은 신숙주의 부인이 남편의 배신을 질타하면서 자살한 것으로, 가공의 줄거리까지 지어냈다. 정몽준의 변심이 그날 홧김에 한 우발적 행동인지 아니면 작전세력의 작품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나는 후자라고 본다) 어쨌든 결과는 일반적 기대와 정반대로 가버렸다. 유달리 배신을 싫어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무시한 데서 온 실패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사필귀정이다,
노무현의 승리는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해방 후 선거 역사에서 민주진보세력의 첫 승리였다. 물론 5년 전 김대중의 승리가 있었지만 그것은 김종필과의 연대, 즉 디제이피(DJP)연합이라는 고육지책을 써서 얻은 승리였고 그래서 당선 뒤에도 계속 진보·보수 연합정권으로서 한계에 직면했다. 첫회에서 썼듯이, 나는 국민의 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간 이유는 이렇다. 그때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던 서울대 한상진 교수로부터 정책기획위원회에 들어와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나는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러나 다음날 마음을 바꾸어 수락했는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김대중 대통령이 약속한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막아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기념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이건 아니다 싶어 대구·경북 교수들의 반대서명을 주도해서 수백명 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통령 자문위원회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올 것이고, 박정희기념관을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 그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뒤 대통령과 만나 식사하는 자리가 세 차례 있었지만 발언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박정희기념관은 디제이피연합 때 김종필이 요구한 하나의 조건이었다고 하니, 내가 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건립 반대 의견을 냈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2002년 선거에서 노무현 승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세력 자력으로 이뤄낸 첫 승리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이런 선거혁명이 있기까지는 물론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 지금까지 흔히 보던 정치인과 사뭇 다른 인물이 있었다. 3당 합당 때 홀로 일어나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정의감.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출마하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던 용기, 그런 것이 많은 국민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렇고 그런, 늘 보던 약삭빠른 정치인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한 것이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노무현에 걸었던 수많은 민초들이 있었다. 그런 민초들이 썩어빠진 정치판을 한번 바꿔보자는 염원으로 결집한 힘이 2002년 대선 승리를 이룬 것이다.
훗날 우연히 듣고 깜짝 놀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날 2002년 12월19일 대선에 노무현 후보에게 한 표를 찍기 위해 유럽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유권자가 있었다. 한국의 어느 저명한 가톨릭 주교의 동생인 수녀가 노 후보에게 한 표를 보태기 위해 10시간 넘는 먼 길을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던 것이다. 지금은 재외국민도 투표에 참가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런 제도가 없었다. 물론 한 표로 승부가 바뀔 일은 없다. 그런데도 한 표를 찍기 위해 달려온 그 수녀를 생각하면, 나는 도대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한번이라도 남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안도현 시인의 짤막한 시 ‘너에게 묻는다’가 생각난다.
변화를 바라는 수많은 민초들의 염원, 이것이 뭉쳐져 20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혁명이 일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방 후 반세기 만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선전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투개표에 선거를 도둑맞았고 그 뒤 억울하게 사형까지 당했다. 1960년대에는 제법 박빙의 선거가 있었지만 연달아 졌고, 유신독재 이후에는 선거 자체가 무의미했다.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의 승리, 그리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간’ 김영삼의 당선이 있었다. 그리고 디제이피연합이라는 절반의 승리에 이어 노무현의 승리는 민주세력의 최초의 자력 승리였다. 오래 억압받던 민중의 승리이자 역사의 진보다. 그렇게 노무현 정부는 중요한 역사적 시험대에 올랐다.
2002년 12월19일 밤새 서울 광화문에 모여 제16대 대선 개표 실황을 지켜보던 국민들이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11월15일 심야담판에 나선 민주당 노무현(오른쪽)·국민통합21 정몽준(왼쪽) 후보가 자정이 지나서 단일화 원칙에 합의한 뒤 여의도의 포장마차에서 소주로 러브샷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12월18일 밤 정몽준 후보의 ‘지지 철회’ 발표에 낙담한 노무현(왼쪽) 후보와 정대철(오른쪽) 고문이 정 후보의 집을 향해 민주당사를 나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3년 12월19일 새벽 서울 평창동 집으로 정몽준 후보를 만나러 갔던 노무현 후보가 끝내 만나지 못한 채 돌아서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12월19일 대선 개표 결과 노무현 후보는 57만표 차이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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