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3화 대통령직 인수위(상)
2003년 1월10일
당선자와 인수위 간사단 첫 회식 날,
마침 식당이 누전으로 정전이 되는 바람에
급히 비상전등을 동원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몇 개 조명등이 눈부시게 비치는,
영화 촬영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노무현 당선자는 말했다.
“장관들과 5년 임기를 함께 가겠다”
2002년 12월20일 제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여러 신문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예상 명단을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 이름이 나오는 신문도 있었다. 나는 한국경제학회 50돌 기념 논문 쓰기에 쫓겨 선거캠프에는 간 적도 없고, 후보를 만난 것도 딱 세 번뿐이었는데, 내 이름이 난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래도 만사불여튼튼, 캠프에서 일하던 조재희 박사에게 전화해서 혹여 인수위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런데 12월26일 아침 일찍 친구가 건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깼다. <중앙일보> 1면에 인수위 명단이 보도됐는데, 내 이름이 경제1분과 간사로 났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 급히 조 박사에게 전화해 이름을 빼달라고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안 된다고 했다.
인수위원장 임채정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인수위원 자리를 고사했다. 그러나 임 위원장도 지금은 사퇴가 불가하다고 했다. 그래서 2개월 동안 인수위 활동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대학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두 번 세 번 다짐받고 수락을 했다. 공무원 친구들 몇 명에게서 축하 전화가 왔다. 조금 뒤 <한겨레>, <중앙일보>와 간단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이튿날에도 전화통에 불이 났다. 집과 연구실 전화는 아예 받지 않았는데, 조교 말로는 경북대 경제학과 사무실에도 수십통이 걸려왔다고 했다. ‘염량세태’(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세태)란 말을 실감했다.
12월28일 토요일 낮 12시 국회 귀빈식당에서 인수위 상견례를 했다. 위원장은 임채정 의원, 부위원장은 김진표 국무조정실장, 간사 6명(정무 김병준, 외교통일안보 윤영관, 경제1 이정우, 경제2 김대환, 사회문화여성 권기홍, 기획조정 이병완)과 이종오 국민참여본부장을 비롯해 총 25명으로 구성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했다. 경제1분과는 재경부·기획예산처·공정거래위·금융감독위·국세청 등을 담당하며, 위원은 나와 더불어 허성관 교수(동아대), 이동걸 박사(금융연구원), 정태인 선생(경제평론가)이었다. 이날 인수위원 25명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비상연락망을 한 장씩 나눠주는데, 내 이름만 공란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급히 휴대폰을 샀으니 번호를 좀 받아적어 주세요” 하니 모두들 웃었다. 휴대폰 없이 시골 선비로서 유유자적하던 좋은 세상은 그날로 끝나버렸다. 아, 지난날이여, 안녕.
노무현 인수위는 온통 학자로 채워졌다. 게다가 지방대 교수들이 많이 발탁된 특징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희한한 말인 ‘지방대학’(선진국의 명문 대학은 대부분 지방에 있다)은 은근히 업신여기는 뉘앙스를 풍긴다. 잘못된 풍조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인수위는 지방을 중시하는 당선자의 철학을 보여준 통쾌한 인선이었다. 국민의 정부 인수위는 대부분 정치인으로 구성됐고, 하는 일도 주로 인사 문제에 집중했다고 한다.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때 장관 인선에 참여했던 어느 선배한테서 듣기로는 호텔방에 소수가 모여 하루 이틀 만에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고 한다. 그에 반해 노무현 인수위는 장관 인선에 최초로 국민참여 방식을 도입했고, 투명하고 합리적인 인선이 되도록 노력했다.
노무현 인수위는 학자 중심으로 짜였고, 하는 일도 5년간 주요 국정업무의 큰 방향을 잡아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이것은 ‘학자군주 노무현’(노 대통령 서거 후 내가 붙인 이름)다운 방식이었다. 노무현 캠프에서 일했던 학자가 25명 정도라고 하던데, 인수위 25명과 숫자가 비슷했다. 이회창 후보를 도왔던 학자들이 500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은 대선 직전 서울의 하림각이라는 큰 식당에서 단합대회를 열어 필승을 다졌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 후보와 1 대 1로, 즉 500장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25 대 500의 싸움에서 노무현이 이겼으니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셈이다.
12월30일(월) 외교통상부에 설치된 인수위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려고 임시 거처인 분당에서 새벽 6시20분 집을 나섰다. 사방이 캄캄한데 중천에 눈썹달과 별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분당에서 광화문 가는 길은 승용차와 버스로 가득 차 꼼짝달싹 못하고 빨간 후미등 행렬만 끝없이 보였다. 심한 교통체증 탓에 첫 모임에 5분 지각하고 말았다. 인수위 현판식을 한 뒤 인수위의 임무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할 일은 주로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정책 비전 제시, 둘째, 중요한 현안 과제 처리, 셋째, 인사자료 축적. 하나 같이 중요한 일이다.
12월31일(화) 인수위 업무 방향 잡는 회의를 했다. 매일 오전 8시30분에 간사회의를 열고,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는 당선자가 주재하는 인수위 전체회의를 열기로 했다. 재경부에서 여성직원 1명과 기사 1명, 차량 1대를 보내주어 큰 도움이 됐다. 인수위 취재 경쟁이 뜨거웠다.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치열한 취재 경쟁에 돌입했다. 기자들은 인수위원 말 한마디라도 따내려고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말 한 마디만 삐끗해도 지뢰가 터지는 난리통이 두 달 동안 이어졌다. 인수위가 자리한 외교통상부 건물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인수위를 둘러싸고 좌충우돌, 소란이 있었다. 환경운동가 김은경 전문위원(문재인 정부 때 환경부 장관)이 ‘경인운하 백지화’ 발언을 해서 파문이 일었다. 2003년 1월9일 노동부 업무보고에서 박태주 전문위원이 보고 내용에 격분해 퇴장하면서 보고서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일이 일어났다. 바로 다음날 <뉴욕 타임스>의 돈 커크 기자가 전경련 김석중 상무(경제조사본부장)의 말을 인용한 기사에 ‘새 정부의 목표는 사회주의’(“Their goal is socialist”)라는 표현이 있어 한동안 시끄러웠다. 인수위는 전경련에 해명을 요구했다. 김 상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김각중 회장이 사과 공문을 인수위원장에게 보냈고, 인수위는 그걸 수용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손병두 부회장은 “전경련은 항상 여당에 협조한다”고 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2003년 1월10일(금) 저녁 노 당선자와 인수위 간사단 첫 회식이 광화문 부근의 한 식당에서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이 식당이 누전으로 정전이 되는 바람에 급히 비상전등을 동원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몇 개 조명등이 눈부시게 비치는, 마치 영화 촬영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경호원들은 무척 긴장했으리라. 이 자리에서 당선자는 개혁과 노·사·정 문제를 조각그림 맞추기에 비유하며 설명했다. 나는 과거처럼 개혁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개혁점검위원회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당선자는 앞으로 장관은 5년 임기를 함께 가겠다고(다만 좋은 사람일 때) 말했다. 다음날 인수위 전체 조회 겸 임명장 수여식에서 당선자는 “생색내는 사람보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묵묵히 일해 신망을 얻는 사람을 중용하겠다. 그리고 인수위에 나온 공무원들은 나중에 각 부처에 돌아가 개혁 전도사가 되어 달라”고 연설했다.
나는 ‘장관들과 5년간 함께 가겠다’는 당선자의 말에 크게 고무됐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장관의 임기가 과거에는 2년 정도 됐으나 점차 짧아져 평균 1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장관들은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하는데 우리나라는 단명 장관이 너무 많다. 국정 위기가 올 때마다 장관을 희생양 삼는 사례가 많아서 그렇다. 그래서 장관 목숨이 파리 목숨이다. 새로 부임한 장관이 업무 파악하는 데만 1년이 걸린다는데 업무 좀 알만하면 나간다는 뜻이다. 이런 비효율, 불합리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나는 노 대통령에게 장관 임기가 너무 짧으니 부디 오래 쓰시라고 두어 차례 건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참여정부에서도 그리 되지는 않았다. 중국에 이런 명언이 있다.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무릇 모든 조직의 장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당선자와 인수위 간사단 첫 회식 날,
마침 식당이 누전으로 정전이 되는 바람에
급히 비상전등을 동원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몇 개 조명등이 눈부시게 비치는,
영화 촬영장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노무현 당선자는 말했다.
“장관들과 5년 임기를 함께 가겠다”
2002년 12월28일 25명으로 구성된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필자는 경제1분과 간사로 선임됐다. 사진은 2003년 2월15일 노무현 당선자과 분과별 인수위원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이정우 간사, 노무현 당선자, 허성관·이동걸 위원. 정태인 위원은 하필 그날 결근해 사진을 못찍었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2년 12월30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현판식이 열렸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중심으로 왼쪽에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이은영 정무분과 위원·이종오 국민참여센터 본부장·이병완 기획조정분과 간사, 임채정 인수위원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김진표 부위원장·권기홍 사회문화여성분과 간사·김병준 정무분과 간사 등이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1월14일 대통령직 인수위는 재계와 첫 공식 간담회를 열고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구상을 밝혔다. 왼쪽부터 이정우 경제1분과 간사, 정태인 위원,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 허성관·이동걸 위원 등이다. 노무현사료관 제공
2003년 1월12일 전경련 김석중 상무가 자신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기사에서 ‘사회주의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3년 1월13일 전경련 손병두 부회장이 ‘김석중 상무의 발언 파문’을 대한 임원단회의 보고서를 들고 김각중 회장실로 향하고 있다. 전경련은 이날 오후 정태승 전무 등을 인수위로 보내 ‘김각중 회장의 사과문’을 정순균 인수위 대변인에게 전달했다. 연합뉴스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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