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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그곳의 나의 책상들

등록 2023-02-22 18:30수정 2023-02-23 02:37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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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전은지 |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하와이에서 마지막 날, 연구실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짐을 정리하기 위해 연구실로 갔다. 오랜 외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날 오후. 느릿느릿 책상 서랍 하나하나를 열어 잊은 것이 있는지 확인한다. 책상이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하고 책상 위에 손을 올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책상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 내 웃음과 눈물을 너는 다 보았지. 묵묵하고 든든하게 거기 있어줘서 고마웠어.”

이 무슨 애틋한 책상과의 마지막 인사냐고 웃겠지만, 어떤 곳을 떠날 때 그곳에서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책상에게 마지막 인사를 정식으로 건네는 것은 나만의 이별 의식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책상으로 돌아오고, 책상에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밤이 되면 책상을 떠난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수백억광년 광대한 우주를 고민하고 그곳을 탐사할 시속 수만킬로 속도의 우주선을 연구하는 것이 내 업이지만, 그 실상은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컴퓨터와 논문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루를 책상에서 보내는 삶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박사 학위를 했던 미국 앤아버의 미시간대학 항공우주공학과 건물 2층의 연구실. 동료 두명과 함께 쓰는 작은 연구실 제일 안쪽이 내 자리였다. 앤아버를 떠날 때 연구실 책상을 비우는데 서랍 안에 까만색 사인펜으로 적힌 글자가 언뜻 형광등에 스쳤다. 까만 바닥에 까만 사인펜이라 그동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만두는 건 아직 늦지 않았어.”(It’s never too late to get out now)

그렇다. 책상에 앉아 연구한다는 것은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의 싸움이었다. 저 큰 우주와 대비되는 보잘것없는 내 능력에 대한 회의, 연구를 계속할 기회가 있을 것인가와 같은 미래에 대한 걱정도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하루하루 반복되는 이 지루한 과정을 평생 버티며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글을 함께 본 옆자리 동료가 말한다.

“메시지를 너무 늦게 보는 바람에 너 박사 되었다?”

우리는 함께 깔깔 웃었다. 책상의 전 주인은 그만두기는커녕 이미 오래전에 학위를 받고 졸업하여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상에서 격한 희로애락을 반복해서 겪는 연구자의 삶이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책상과의 작별 인사는 독일과 영국에서 썼던 오래된 나무 책상과 하와이에서 썼던 철제 책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아마도 가장 오래 사용하게 될 책상을 만나 여전히 책상에서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경력과 나이가 쌓여가면서 책상 앞에서 본격적으로 매달리는 연구 말고도 연구실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 간혹 연구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연구실로 얼른 돌아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 나의 자리는 역시 내 책상 앞인 것이다.

내 책상 위에는 늘 같은 메모가 있다.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씁니다.’ 하루키가 그의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사크 디네센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썼던 문장이다. 이 문장을 접한 뒤로 새로운 연구실을 배정받을 때마다 빨간 포스트잇에 제일 먼저 이 문장을 써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붙여놓는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는 살 수 없겠지만, 희망이 많거나 절망이 자주 와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연구를 마냥 사랑한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연구는 끝이 없는 시도의 연속이고, 반복 속에서 여전히 종종 지칠 것이다. 다만 이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고 쓴다. 실패 뒤에 올 성공이 기다려져서 그러냐고? 아니. 연구의 빛나는 부분은 문제를 풀어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문제를 풀려고 아등바등하는 데 있다고 쓴다. 아등바등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떤 문제도 시간이 걸릴 뿐 결국에는 풀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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