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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챗지피티와 번역가의 운명

등록 2023-03-06 18:39수정 2023-03-07 02:39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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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딩을 하는 시대가 됐다. 모든 지식노동자의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심지어 의사나 법관처럼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조차 결국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소멸할 직업 제1순위로 꼽히는 것은 번역가다. 인공지능 번역이 자연스럽고 매끄러워 머지않아 번역가들 모두 직업을 잃을 것이라고 한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챗지피티(ChatGPT)와 뛰어난 번역 품질로 유명한 딥엘(DeepL)을 써서 몇주간 이런저런 글을 번역해봤다. 충격적이었다. 인공신경망 구글 번역만도 놀라웠는데, 생성형 인공지능 번역은 차원이 다르다. 그럼 이제 번역가라는 직업은 사라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나는 의사였지만 15년 전부터 캐나다에서 번역을 업으로 삼아 산다.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이는지 번역가로 먹고사는 방법을 묻는 분들이 적잖다. 항상 이런 말로 설명을 시작한다. “번역에는 상업번역과 출판번역이 있습니다.”

상업번역은 실용적인 목적이다. 의학 분야라면 의료기 사용설명서나 임상시험 규정집 등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다. 창의성이나 예술성은 필요 없고, 정확함과 납기 준수가 생명이다. 수입은 괜찮지만 이름이 남지도 않고 뭔가 창조했다는 성취감은 느낄 수 없다. 출판번역은 책을 옮기는 일이다. 수입은 적지만 끊임없이 도전할 거리가 있고 성취감도 적지 않다. 실용서를 옮기려 해도 모국어를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문학이나 문학적 논픽션은 창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원저자의 개념과 의도, 상상력이 그려내는 풍경을 어떻게 전달할지 전략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번역가의 독특한 문체와 분위기를 더해 새로운 ‘작품’을 써내야 한다. 비유컨대 피아노 협주곡 ‘황제’는 베토벤의 곡이지만 호로비츠부터 임윤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모두 다르고, 각기 독특한 작품인 것과 비슷하다.

번역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번역이 창작, 하나의 예술임을 쉬 잊는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따위를 두고 입씨름할 뿐이다. 출판시장에서 번역서 비중이 약 30%로 세계 1위라지만 번역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기존 번역이 모두 잘못됐다며 어이없는 번역서를 쏟아내는 사기꾼에 환호하고, 유수의 출판사에서 미국 남부 사투리를 전라도 사투리로 옮기는 촌극을 벌인다. 독자도 번역이 조악하든 말든 외국책을 남보다 빨리 읽어 한발이라도 앞서가려고만 한다. 허겁지겁 읽고, 생각 없이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멘토를 자처한다.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조차 외국의 시각과 이론을 빌려 해석하고,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정신 심리적으로는 모두가 미국인처럼 아프다. 이런 풍토에서 번역가는 올바르게 평가받을 길이 없고, 평가가 없으니 발전도 없다. 우리나라 번역서에 오역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까무러칠 것이다.

그러니 번역의 미래는 번역가나 인공지능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상업번역 시장에는 기계번역이 자리잡은 지 오래다. 대부분 일거리가 기계번역을 감수하고 다듬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조차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다. 출판번역은 어떨까? 인공지능 번역은 언뜻 보면 유려하고 자연스럽지만, 메마른 느낌이 들고 쉬 읽히지 않는다. 단순히 지식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데 만족한다면 번역가는 사라질 것이다. 느린 것, 아름다운 것, 깊이 생각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많다면 살아남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는 막을 수 없다. 산업혁명 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직업이 그랬듯, 앞으로 직업들이 사라질 것이다. 창의적으로 뭔가를 만드는 능력, 비판적 사고로 종합하는 능력, 남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살아남으리라 한다. 누구나 불안하고 두렵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많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소중히 여길 것인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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