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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바다를 찾아 수장된 아버지 넋을 기리다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등록 2023-03-07 17:34수정 2023-03-08 02:34

[제노사이드의 기억] 창원
당시 학살된 마산형무소 수형자와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등 1681명 가운데 최소 717명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앞바다에 총살 수장됐다. 미제 전차상륙함(LST)에 태워져 오랏줄에 한데 묶인 채 바다 위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주검은 근처 옥계마을 등 해안가뿐 아니라 조류에 떠밀려 일본 쓰시마섬까지 흘러갔다.

2016년 7월9일 경남 창원시 돝섬유원지 선착장을 출발한 시내버스 정도 크기의 작은 여객선은 느린 속도로 한시간 남짓 달려 밤이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는 ‘괭이바다’에 도착했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1950년 7~9월 마산지역 군·경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1681명을 학살했는데, 이 가운데 최소 717명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앞바다에 총살 수장됐다. 선박이 너무 작아 갑판으로 나가지 못한 유가족들이 선내에서 묵념하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2016년 7월9일 경남 창원시 돝섬유원지 선착장을 출발한 시내버스 정도 크기의 작은 여객선은 느린 속도로 한시간 남짓 달려 밤이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는 ‘괭이바다’에 도착했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1950년 7~9월 마산지역 군·경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1681명을 학살했는데, 이 가운데 최소 717명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앞바다에 총살 수장됐다. 선박이 너무 작아 갑판으로 나가지 못한 유가족들이 선내에서 묵념하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여객선 엔진소리가 작아지더니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곡으로 ‘밤하늘의 트럼펫’ 연주가 선내에 울려 퍼졌다. “이승만 정부는 내 편이 아닐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민간인을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학살해 산속이나 계곡 또는 바다나 하천에 버렸습니다.”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2016년 7월9일 창원시 돝섬유원지 선착장을 출발한 여객선은 한시간 남짓 만에 밤이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고 해서 ‘괭이바다’라고 부르는 해역에 도착했다. 배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마산지역 헌병대와 경찰 등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학살된 마산형무소 수형자와 마산지역 보도연맹원 등 1681명 가운데 최소 717명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앞바다에 총살 수장됐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편). 미제 전차상륙함(LST)에 태워져 오랏줄에 한데 묶인 채 바다 위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주검은 근처 옥계마을 등 해안가뿐 아니라 조류에 떠밀려 일본 쓰시마섬까지 흘러갔다.

파도를 헤치며 위령제를 지낼 괭이바다에 도착했지만, 배 크기가 너무 작아 유가족들은 한꺼번에 갑판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선내에서 제66주기 9차 창원지역 합동위령제 추모식이 진행되면서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은 교대로 갑판으로 나와 준비해온 국화 송이를 바다에 던졌고, 가슴에 품고 있었던 ‘보고 싶어요. 아버지’ ‘왕생극락하소서 큰딸 올림’ 같은 글귀가 쓰인 풍선을 하늘로 띄워 보냈다. 아버지가 수장됐을 바다를 손으로 가리키다 어느새 눈동자가 붉어진 유족들이 여럿이었다. 한 유족은 파도에 휘청이는 갑판에 주저앉아 난간을 부여잡고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 아버지”를 되뇌며 눈물을 연신 훔쳤다.

“다섯살 때 아버님은 제 곁을 떠났습니다. 철이 없던 사춘기 소녀 때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죠. 갓 스무살 때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연좌제의 공포를 아버지는 모르시겠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이제 칠순이 돼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미워했던 아버지께 용서를 빌며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어내는데 남은 생을 바치겠습니다.”

유가족 전술손씨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리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했다. 실제 위령제에 참석한 유가족 대부분은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거나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를 나잇대가 많았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에서 출간한 증언집을 보면, 희생자들은 군·경에 끌려나가며 거의 공통으로 “별거 아이다. 조사만 받고 오꾸마”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비의 얼굴을 모르는 자식들은 파도만 일렁일 뿐 그날을 기억할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는 괭이바다를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육지로 돌아온 유족들은 괭이바다에서 제대로 술잔을 올리지 못했다며 ‘진해루’라는 정자에서 제대로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올렸다. 제사상 뒤로 펼쳐진 희생자 463명 신위가 쓰인 펼침막이 거센 바닷바람에 심하게 펄럭였다. 4년 뒤 2020년 6월13일에도 괭이바다에서 추모제가 열려 참여했는데, 이때는 여객선 공간이 넉넉해 유가족 모두가 넓은 갑판에 모여 술잔을 올리며 추모제를 열 수 있었다.

희생자들이 수장되고 70년이 흐른 뒤인 2020년 2월 창원법원 마산지원 형사부(재판장 이재덕)는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재심에서 노치수 회장 선친 등 피고인 6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계엄당국의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검찰관 1명이 하루에 159명을 사실심리하는 등 형식적인 기소-재판 철자를 거쳤을 뿐이었다. 재심에서 검찰 쪽은 범죄사실을 증명할 아무런 자료도 제출하지 못했다.

지난해 11월26일 괭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언덕에서 유가족들의 염원을 담은 창원위령탑 제막식이 열렸다. ‘그날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위령탑에는 520여명 희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사만 받고 오꾸마’라며 집을 나선 이들에게 ‘그날’은 어떤 의미였을까. 끌려간 가족의 행방은 물론 생사조차 알 수 없이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평생을 살다 세상을 뜬 이들의 ‘눈물’은 누가 어떻게 닦아줄 수 있을까.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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