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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심채경의 랑데부] 무엇일지 모를 또다른 랑데부를 기대하며

등록 2023-03-09 18:33수정 2023-03-10 02:37

랑데부 자체를 목표로 하는 탐사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소행성과 근접거리에서 동행하면서 상세히 관측하는 것이다. 한차례 지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행성의 궤도를 하염없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당초 설계한 탐사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한 뒤 적절한 시기에 임무를 마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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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채경 |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지난가을, 학회 참석차 제주행 비행기에 탔다. 팬데믹의 기세가 조금 사그라들면서 다시 이런저런 출장이 잦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륙을 앞두고 기장의 안내방송이 있었다. 비행기의 출발지와 목적지, 비행시간, 날씨 등을 알리는 기내 방송 특유의 빠르고 사무적이며 묘한 권위가 동시에 느껴지는 둔탁한 음성.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냈다. 기장이라면 전세계 공통으로 누구나 비슷한 어조로 말하도록 훈련이라도 받는 걸까, 하는 사소한 궁금증이 소리 없이 일었다가 비눗방울 터지듯 톡 사라지던 순간, 기장은 이런 말로 안내방송을 맺었다.

“지금 탑승한 승무원은 사랑하는 제 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매너리즘을 깨고 튀어나온 의외의 문장에 내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부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에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날짜와 항공사 이름도 적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걸려 온 동료의 전화에 용건은 뒤로하고 이륙 전에 들은 기장의 안내방송 이야기를 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기억을 나누고 싶었다.

아버지 기장은 딸 승무원의 이름이나 기내 어느 구역에서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 같은 것은 말하지 않고 짧은 말로 방송을 마무리했을 따름이었지만, 나는 상상의 나래를 폈다. 아버지는 딸을 무척이나 아끼고 자랑스러워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유사한 분야의 직업을 가지고 같은 회사에 다니며 때때로 같은 일정으로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긍지와 사명감을 얼마나 높이겠는가 생각했다. 승무원으로 근무 중인 딸을 태운 비행기를 아버지 조종사가 몬다면 이번 비행은 아주 안전하겠구나, 하면서 속으로 쿡쿡 웃기도 했다.

제주까지 비행하는 한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두 사람의 우주를 잠시 만난 듯했다. 어쩌면 기장의 말은 진짜 부녀 사이가 아니라 힘든 환경에서 고객에게 응대해야 하는 승무원들을 누군가의 딸처럼 생각하고 존중해달라는 비유적인 요청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장이 뜻한 바가 어느 쪽이든, 그날의 비행은 내게 좋은 랑데부였다. 다시 생각해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고 동시에 살포시 미소를 짓게 되는, 오묘한 랑데부를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가벼운 발걸음은 뭔가 충만함으로 가득했다.

우주탐사에서 랑데부는 우주 공간에서 각자 나름의 속도로 움직이던 두 물체가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속도로 발맞추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주인이 국제우주정거장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소유스나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엑스(X)의 크루 드래건 같은 작은 우주비행체를 타고 지상에서 높이 올라가 우주정거장에 서서히 접근해야 한다.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면서 서로 궤도를 맞추는 랑데부 상태로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가 도킹한다. 속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충돌해버리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둘 다 위험한 상황이다. 게다가 작은 우주비행체에는 연료도 조금만 실을 수 있으니 기동력을 발휘할 기회도 충분치 않다. 그러니 궤도를 바꾸기 위해 다른 궤도에 이르는 사건은 짧고 굵게 이뤄져야 한다.

랑데부 자체를 목표로 하는 탐사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소행성과 근접거리에서 동행하면서 상세히 관측하는 것이다. 한차례 지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행성의 궤도를 하염없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당초 설계한 탐사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한 뒤 적절한 시기에 임무를 마친다.

무인탐사선을 달에 착륙시킨다든지 하는 식으로 영원히 함께하는 것과는 다르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과 임무 속에서 짧은 시간 다른 세계와 만나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는 것, 그것이 랑데부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처럼, 살면서 만나는 어떤 랑데부는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져버린 뒤에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은 랑데부를 경험한 사람은 앞으로 올, 무엇일지는 모르지만 또다른 랑데부를 기대하며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힘을 들어붓는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랑데부라는 제하로 함께할 수 있었던 몇편의 알량한 글로 누군가의 운명 지침 같은 것을 돌려놓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눈길이 머문 어떤 이에게는 잠깐의 즐거운 동행비행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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