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는 197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마오쩌둥의 의심과 견제, 권력투쟁에서 살아 남아 외교와 경제를 관리했다. 1980년대 덩샤오핑 시대, 자오쯔양 총리는 개혁개방과 정치 개혁 등을 주도했지만 천안문(톈안먼) 시위대에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실각해 16년 동안의 가택연금 끝에 세상을 떠났다. 1990년대 주룽지는 “경제 짜르”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총리로서 국유기업 개혁을 주도하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끌었다. 2000년대 원자바오 총리는 초고속성장을 지휘하면서 정치 개혁을 거듭 호소했지만 현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막바지에 그가 남긴 말은 “정치체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문화대혁명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였다.
2013년 명석한 경제 전문가로 유명한 리커창은 총리 취임 뒤 첫 기자회견에서 개방을 확대하고 정부 역할을 줄이겠다며 개혁은 “손목을 자르는 것 같은 의지가 필요하다”고 각오를 밝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절대권력에 눌려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초라하게 퇴장했다. 리 총리가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고 한 의미심장한 고별인사마저 검열로 지워지고 있다.
11일 중국의 8번째 총리가 된 리창(63)은 새로운 유형의 총리다. 그는 전임자들과 같은 경제 정책의 전문성도, 중앙정부를 관리한 경험도 없다. 시진핑 주석과 마찬가지로 문혁 시기에 성장했고, 저장농업대학 닝보분교에서 농업기계화를 공부하고 저장성 지방관리로 경력을 시작했다. 2004년 저장성 당서기이던 시진핑의 ‘비서’ 역할을 맡아 모든 시찰에 동행하고 연설문과 정책 초안을 작성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2012년 시진핑이 중국 최고지도자가 되면서 리창은 저장성과 장쑤성, 상하이 당서기로 초고속 승진 가도에 올랐다. 그의 대표적 ‘업적’은 상하이에 테슬라 전기차 공장을 유치한 것이다. 시진핑의 뜻에 따라 ‘제로 코로나’ 정책을 엄격히 적용해 66일간 상하이를 봉쇄한 것은 ‘오점’이지만 시진핑에게 충성을 다시 한번 증명한 사례다. 지난해 말 중국이 갑작스럽게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폐지한 것도 그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 회복을 서두르기 위해 시진핑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시진핑-리창은 황제-신하의 ‘군신 관계’와 비슷할 것이다. 최초의 3연임 국가주석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듯 행동하는 시진핑은 지금까지 총리가 이끄는 국무원(행정부)에서 맡아온 경제·금융·안보 분야도 공산당 직속으로 옮겨 자신이 직접 관할하도록 정부 조직도 개편했다. 제로코로나 정책 실패로 흔들린 권위를 회복하고 미국의 견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 경제를 내수와 첨단제조업 위주로 개혁하는 작업도 직접 지휘하려 한다. 리창은 시 주석의 결정과 지시를 일사불란하게 이행하는 비서의 역할에 가까울 것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은 당으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인 행정부, 민간, 지방, 전문가의 공간을 넓혀 왔다. ‘심복 총리’ 리창의 등장은 이제 그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상징한다.
박민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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