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기현 신임 당대표 등 새 지도부가 8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3차 전당대회에서 손을 들어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예찬 신임 청년최고위원, 조수진·김병민 신임 최고위원, 김기현 신임 당대표, 김재원·태영호 신임 최고위원. 공동취재사진
[한겨레 프리즘] 김태규 | 정치팀장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시는 1951년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실에 입장한 8명에게 선분 하나가 그려진 종이를 보여준 뒤 추가로 각기 다른 길이의 선분 3개를 제시하고 이전 선분과 같은 길이의 것을 고르게 했다. 확연하게 정답이 눈에 들어오는 쉬운 문제가 반복해서 출제됐는데, 3번째 문제부터 참여자들 다수가 오답을 말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 실험에 참여한 8명 중 7명은 ‘연기자’였고 1명만이 진짜 실험 대상자였다. 연기자들이 연구진과 약속한 대로 모두 오답을 말하자, 실험 대상자는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다 다수의 뜻에 따라갔다.
실험 대상자 123명 중 94명(76.4%)이 한번 이상 오답을 말했다. 12번 반복된 시험에서 모두 오답을 말한 이도 6명이나 됐다. 123명이 치른 1476개 문제 전체 오답률은 36.8%였다. ‘집단 압박’에 쉽게 굴복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실험이었다. 오답을 말하라는 ‘무언의 강요’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정답을 말한 이는 29명(23.6%)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할 말은 하는 이들이다.
솔로몬 애시의 실험에서 제시된 선분들. 오른쪽 비교 선분들 가운데 2번이 첫번째 선분과 길이가 같은 게 명확했지만, 다수가 1, 3번을 지목하자 실험자 상당수는 이들을 따라 1, 3번을 답으로 택했다. 나무위키 갈무리
지난 8일 끝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선 이견이 용납되지 않으며 친윤석열계가 완승했다. 내년 총선에서 ‘윤심 공천’을 하겠다고 공언한 김기현 후보가 1차 경선에서 과반 득표로 새 대표에 선출됐다. 지도부에 안착한 조수진 최고위원은 대선 캠페인이 한창이던 2021년 12월 선대위 공보단장 시절, “내가 왜 (이준석) 당대표의 지시를 받아야 하냐. (윤석열 대선) 후보의 이야기만 듣겠다”며 윤 대통령을 향한 충성심을 강조했던 전력이 있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최고위원은 남북의 군사적 긴장 상황을 “윤석열 대통령의 한판승”이라고 추어올리며 ‘친윤 정체성’을 강조했다. 김병민 최고위원은 대선 선대위 대변인이었고 장예찬 청년최고위원은 윤 대통령의 ‘1호 청년참모’다.
반면 윤핵관(윤 대통령 핵심 관계자)과 일전을 불사하며 쓴소리를 마다치 않겠다던 ‘천아용인’(천하람·허은아·김용태·이기인)은 참패했다. 이준석 징계에서 시작된 새 지도부 선출의 목적이 ‘친윤 완전체’ 구성이었기에 이들의 실패는 예견된 결과였다. 국민의힘 주류는, 1년9개월 전 당심에서 근소하게 지고도 민심으로 승자가 된 ‘이준석 경로’를 봉쇄하려고 여론조사 30% 반영 규정을 없앴다. ‘선진적으로’ 도입된 결선투표제는 친윤계 후보가 난립하는 사이 혹시 모를 비주류의 연합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친윤 후보가 김기현 1인으로 정리된 뒤에는 나경원 전 의원의 출마를 막으려 ‘집단 린치’까지 가해졌다. 사실상 각본 있는 드라마였다.
치밀하게 또는 우악스럽게 진행된 ‘기획’에 국민의힘 당원들도 적극 호응했다. 정권교체 뒤 치르는 총선에서 이기려면 대통령 중심의 단결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과 이 정부가 가는 길이 옳다면 똘똘 뭉치는 게 낫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에도 굴욕적인 강제동원 해법을 밀어붙이고 △‘검사끼리 인사참사’에도 문제의식이 전혀 없으며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명해졌다”며 실체도 불분명한 ‘이권 카르텔’을 때려잡겠다는 윤 대통령의 폭주에는 제동이 필요한 상황이다. 윤 대통령을 향해 천하람·안철수 후보가 ‘다른 목소리’를 낼 법했고, 이들에게 공감한 당원이 38.35%(천하람 14.98%, 안철수 23.37%)에 이르지만 이들에겐 앞으로 발언 기회가 없다. 천아용인을 향해 “경기를 망치는 훌리건”(김재원 수석최고위원)이라고 힐난하는 걸 보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억눌릴 가능성이 크다.
애시 ‘선분실험’에서 반전은 실험에 참여한 연기자 1명이 정답을 말했을 때 발생했다. 모든 이가 오답을 대며 만장일치로 압박했을 때 36.8%였던 오답률이 5%로 뚝 떨어진 것이다. 국민의힘은 지명직 최고위원 1명이 합류하면 새 지도부가 완성된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이가 단 1명이라도 발탁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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