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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낡은 껍질 깨지는 소리

등록 2023-03-13 18:34수정 2023-03-14 02:3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이광이 | 잡글 쓰는 작가

어어~ 하고, 입에서 소리가 나면서 손에서 뭣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다완(茶碗)이다. 나를 떠난 그 찻사발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낙하하더니 ‘퍽’ 깨져 산산조각 흩어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아이고 아까워라! 어느 장인의 작품으로 딱 한 점 갖고 있던, 쌀가마니값이나 나간다던 물건인데, 그 아침에 왜 그것을 만지작거렸는지 후회막급이다. 박물관의 토기처럼 행여 붙여볼까 하고 조각들을 신문지에 싸두고 나왔는데 그 생각이 머릿속에 맴맴 돈다. 불경 읽기를 함께하는 스님에게 그 얘기를 하니 단박에 “거, 잘 깨져버렸네!” 하는 것 아닌가. “스님, 불난 집에 부채질 참 세게 하십니다” 하니, “그런 것을 구각(舊殼)이라고 허는 거여. 낡은 껍질이 툭 깨져 나갔으니 잘된 일이 아니고 뭐여?” 그것이 잘된 일인가? 아직 마음이 거기까지 안 간다.

선배, ㅈ형으로부터 선물이 왔다. 소포를 뜯으니 오페라 디브이디(DVD) 60여장이 담겨 있다.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7장 세트를 비롯해 벨리니, 모차르트 등등, 그리고 푸치니 <라 보엠>은 지휘자가 다른 여러 버전이 포함돼 있다. 애호가를 넘어 수집가의 일면이 엿보인다. 며칠 전 전화가 왔었다. 집 물건을 이것저것 정리하는데, 오페라 어떠냐고 해서 좋다 했더니 보내준 것이다. 그참저참해서 막걸리를 한잔 나눴다. 우리는 오랜만에 황학동 청계8가, 중고 음반을 사러 헤매고 다니던 시절 얘기로 꽃을 피웠다. 바흐의 절판된 음반을 손에 쥐었을 때, 비닐 포장을 뜯어 이리저리 만져보던 때의 기쁨, 그 아름다운 소리에 흠뻑 젖어들던 시간들에 대하여. 뭐 하러 그리도 사 모았는지, 그것도 열정이었을까?

그때 들은 얘기 한 토막. 어느 날 갑자기 귀한 음반들이 트럭으로 나올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누가 떠났구나, 한단다. 애호가 아무개가 애지중지 사 모았던 음반들이 저렇게 무더기로 쏟아지는 것은, 필경 그이가 하직했다는 것이라, 이제 타인이 된 가족들이 몽땅 내다 파는 것이다. 그것들을 근으로 떠서 사고, 느닷없는 횡재를 하게 된다고 한다.

ㅈ형은 자기 물건을 잘 풀었다. 전에 클래식 시디(CD) 한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 회사 책상 위에 풀어놓고는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고 해서 여럿이 좋아했던 생각이 난다. 언젠가 산행 때는 늘 자랑하던 미국 해병대용 버너를 누가 부러워하자 그 자리에서 넘겨주던 기억도 난다. “언제 히말라야를 가겠냐, 혹한에 비박을 하겠냐, 이제 블루스타 버너면 족하더라”는 말을 남기면서. 그리고 내게 음반을 보내준 일도 그렇다. 뭘 주는 것은 마음이 나가면 못 하고, 손이 나가야 한다. 마음은 자꾸 변하지만 손은 한번 나가면 못 돌아오는 법. ㅈ형은 늘 손이 쑥 나가곤 했다.

가만히 방을 둘러보니 물건들이 꽉 찼다. 장롱과 창문을 빼고는 책이며 음반, 보이병차 덩어리들이 삼면에 빼곡하다. 한번 듣고는 다른 것을 사고, 절반도 못 읽고 또 다른 책을 사고, 지금은 그것들 위에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있다. 저것들이 짐이 되고 있구나. 방은 욕심을 부릴 때마다 작아져 어디 물건 둘 데도 없다. “쌓아두면 똥 된다. 선물은 살아 있을 때 줘야지 죽은 뒤에 주면 유물이라 누가 받지도 않는다”던 노모 말씀이 생각난다.

“그렇게 깨질 줄 알았으면 누굴 줘버리든지 그럴 걸 그랬어요” 하니, 스님 “미련이 많네” 하신다. “그런 것을 구각탈피라고 하는 거여. 씨앗이 말이야, 껍질이 탁 깨져나가야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허물을 쑥 벗어버려야 나비가 되는 거여. 그것을 못 하면 번데기지.” 미련한 것인지 미련이 많은 것인지, 내가 여전히 낡은 껍질 속에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초봄, 여기저기 껍질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개갑탁’(皆甲坼)의 계절이다. 때가 와서 나도 마음을 내어본다. 그렇게 나선 마음이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아직 손이 못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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