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등장인물 평등주의’를 지키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집필 전 등장인물들을 분석할 때 주인공이라고 더 배려하지도, 단역이라고 홀대하지도 않기로 했다. 각자의 인생에선 누구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며, 그 삶의 가치들을 깊이 살피지 않고는 이야기에 다양한 인물들을 풍요롭게 담기 힘들다.
지난 17일, 섬진강 장선 습지를 산책했다. 이날 같이 갔던 개 이름은 ‘삼손’이다. 사진 김탁환
김탁환 | 소설가
2월과 3월엔 개들을 데리고 자주 섬진강 장선습지로 간다. 잣눈은 벌써 녹았지만 봄풀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며, 뱀도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은 습지를 산책하기 위해서다. 강 한가운데 섬이 된 습지에 개들을 풀어놓은 뒤 마른 풀들을 지르밟노라면, 풀 소리와 함께 사뿐사뿐 두발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3월부터는 곡성군민을 위한 글쓰기 강좌도 다시 연다. 10주 연속 강의인데, 벌써 다섯번째를 맞았다. 각자 소개를 겸한 첫 시간엔 겨울 동안 내가 다듬은 글쓰기의 기본자세부터 밝힌다. ‘등장 만물 평등주의’ 이것이 올해 첫 강의 제목이다.
오래전 드라마 촬영장을 방문하였다가 대기실에 머문 적이 있다. 먼저 와 있던 연기자와 두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짧은 대사를 한 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는 역할이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연기를 마치고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촬영이 밀리면서 계속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내게 오늘 이 대기실에 올 때까지 자신의 삶을 들려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지방 극단에 들어갔고, 거기서 10년 동안 연극을 한 뒤 상경했으며, 서울에서 10년 더 연극에 매진한 뒤 첫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등장인물 평등주의’를 지키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고 조연이 있고 단역이 있기 마련이다. 집필 전 등장인물들을 분석할 때 주인공이라고 더 배려하지도, 단역이라고 홀대하지도 않기로 했다. 각자의 인생에선 누구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며, 그 삶의 가치들을 깊이 살피지 않고는 이야기에 다양한 인물들을 풍요롭게 담기 힘들다.
15년 전, 겨울 개마고원이 등장하는 장편소설을 쓰면서, 학교에서 흔히 ‘시간적 배경’, ‘공간적 배경’이라고 가르치는 것들이 한낱 배경이 아님을 통감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라면 어려움 없이 그릴 수 있지만,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개마고원 골짜기들을 하나하나 다르게 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골짜기들의 차이를 묘사하지 못한다면, 내 글은 사실에 기반한 소설이 아니라 우화에 머물 것이다. 동식물 도감이나 체험기나 논문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연해주 라조 자연보호구를 답사한 후에야, 길눈 쌓인 자작나무숲의 고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뭇짐승들의 생존법을 알았다.
영화 <앙>에서 도쿠에 할머니는 일본 전통 단팥빵 도라야키의 팥소를 기막히게 잘 만든다. 할머니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단팥을 만들 때 항상 나는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 오는 날들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팥의 맛과 영양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팥의 긴 여행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도쿠에 할머니의 비법 아닌 비법이었다.
장선습지 마른 풀 소리에도 그들의 일생이 담겼다. 급히 걸으면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지만, 천천히 귀 기울이며 밟으면, 웅덩이 옆 풀 소리가 다르고 아름드리 버드나무 아래 풀 소리가 다르다. 수달들이 밀린 똥을 눠둔 풀 소리가 다르고 장끼가 웅크려 숨은 풀 소리가 다르며 고라니의 경쾌한 발자국이 또렷한 풀 소리가 다르다. 그 차이들을 알고 이제부터 자랄 풀들을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은, 고서(古書)를 숙독하며 어린이들의 앞날을 내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을 배경에 놓지 않고 등장인물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등장 만물 평등주의’다. 이 사람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파악하듯, 이 쌀이 어디서부터 왔고 저 기러기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살핀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무생물이 어우러진 자리에서, 사람을 앞세우기 위해 나머지를 도구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봄꽃은 상춘객을 즐겁게 하려고 피는 것이 아니다.
개들을 앞세우고 장선습지에서 집필실로 돌아왔다. 까치 울음에 이끌려 70년도 더 지난 플라타너스들을 올려다봤다. 작년까진 세그루에 둥지가 각각 있었는데 겨울을 나며 하나가 줄었다. 그곳에 살던 까치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매일 아침 창을 열며 플라타너스를 마주했는데, 왜 나는 둥지가 사라졌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미안하고 안타깝고 한심했다. 둥지가 있던 가지를 향해 기도하듯 읊조렸다. 그곳이 어디든, 둥지를 새로 짓고 이 봄을 즐기며 행복하기를!
지난해 12월28일 집필실에서 찍은 앞마당 사진. 이때 벌써 까치 둥지는 두 개밖에 없다. 사진 김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