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은 대출금리를 시장금리에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이자이익을 취하면서 차주에게 금리부담을 떠넘기는데, 향후 신용위험 확대로 이어져 고객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반면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 지원 과정에서 발생한 잉여자금으로 구입한 장기채 가격이 하락하면서 유동성 문제가 생겼다. 금융 경력이 일천한 스타트업에 중개 역할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위험을 은행 주주들이 떠안은 셈이다. 어느 쪽이 고객중시 경영일까?
지난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 본사의 닫힌 출입문에 붙은 공고문을 누군가 읽고 있다. 샌타클래라/UPI 연합뉴스
윤석헌 | 전 금융감독원장
지난 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시에 본사를 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전격 폐쇄됐다. 하루 전인 9일 하루에만 420억달러가 빠져나가면서 인가자인 캘리포니아주 금융당국(CDFPI)이 폐쇄를 결정했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파산관재인으로 임명돼 파산 절차에 돌입했다. 파산 당시 자산규모 미국 16위인 이 은행은 총자산이 2120억달러(약 277조원)에 달했는데, 총예금 1754억달러의 93%가 예금보험 보호 대상이 아닌 비부보예금이었다.
미국 내 은행 파산 행렬은 8일 샌디에이고 실버게이트은행의 자진 청산에서 시작해 10일 실리콘밸리은행 폐쇄를 거쳐, 12일 뉴욕 가상자산 전문 시그니처은행 폐쇄로 이어졌다. 계속해서 미국에서 자산규모 14위 샌프란시스코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서도 대량 예금인출이 발생해 제이피(JP)모건체이스 등 미국 11개 대형은행이 300억달러의 예치금을 지원했다. 이 덕분인지 지역은행들 주가가 일시 반등했지만,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자금조달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의 영향은 유럽으로도 확산했다. 15일 자산규모 세계 9위인 글로벌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크레디트스위스·CS)가 내부통제 문제점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단소송을 당하면서 주가가 폭락했고, 이어 예금 대량인출이 발생했다. 이에 스위스 중앙은행이 71조원의 구제자금을 투입했고 정부 주도로 스위스 최대 은행인 유비에스(UBS)에 인수됐으나 시장의 불안은 여전하다.
한편 지난 12일 미국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 및 마틴 그루언버그 연방예금보험공사 회장이 실리콘밸리은행의 부보예금과 비부보예금 전액을 지급보장한다는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지난 22일 연준은 베이비스텝(0.25%포인트 인상)을 밟으면서 ‘지속적 인상’이 필요할 수 있다는 표현을 삭제했다.
1983년 10월 출범한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로부터 예금을 받고 대출 및 투자를 해 혁신생태계 형성·발전 지원에 특화한 지역은행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한동안 타 업종 대비 우량한 실적을 거뒀는데, 이에 실리콘밸리은행은 예금이 증가했고 수익성도 양호했으며 실리콘밸리 소재 은행 중 최대 예금고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호경기 속에 투자자들이 줄을 서면서 자금 여유가 생긴 스타트업들의 대출수요가 줄어 실리콘밸리은행은 여유자금을 국채, 모기지, 정부 보증채 등에 투자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준의 긴축정책이 상황을 뒤바꿨다. 실리콘밸리 경기가 식으면서 자금 유치가 어려워진 스타트업들이 예금 인출을 늘렸는데, 이에 응하려고 보유 국채를 매도한 것이 손실을 발생시켰고 이를 메꾸기 위해 증자계획을 발표해 주가 폭락과 지난 9일 대인출로 이어졌다.
경제잡지 <포브스> 메이슨 기자의 실리콘밸리은행에 대한 보도가 흥미롭다. 그간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들에 매우 우호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뒤 지역사회에 은행을 살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 계좌 개설 때 통상적인 최소 예치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은행 중 유일하게 스타트업에 신용라인을 개설해줬으며, 이를 통해 고객들과 관계금융을 형성·유지하면서 신용데이터 수집 노력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특히 고객들의 은행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는 등 초짜 스타트업들이 필요로 하는 은행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줘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은행의 유동성 관리 소홀은 잘못이지만 고객들의 은행 평가는 나쁘지 않다는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 시절 제정된 도드-프랭크법에서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사(SIFI)에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과 순안정자금조달비율(NSFR) 준수 및 종합적유동성측정평가(CLAR) 적용을 요구했다. 그런데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경제성장·규제완화 및 소비자보호법(EGRRCPA)을 시행하면서 도드-프랭크법 적용 대상을 축소해 실리콘밸리은행과 같은 중형은행들은 유동성 측정, 평가 및 보고 의무가 면제됐다. 이런 규제완화가 실리콘밸리은행 등에 파산의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2월 은행이 이자이익으로 보너스 잔치를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질타가 있은 뒤, 금융위원회 산하에 ‘은행권 개선 티에프(TF)’를 꾸려 개선방안 마련에 부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이 국내 은행권에 주는 시사점과 교훈을 살펴본다.
첫째, 실리콘밸리은행은 비록 금리상승과 부실경영 등으로 파산했으나, 국내 은행이 주목할 만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정보와 금융 이력이 부족한 스타트업들과 관계금융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려 노력한 점이다. 금융의 본질에 투철한 지역은행으로 중개 역할에 충실한 점 본받을 만했다.
둘째, 실리콘밸리은행은 위험분담에서 국내 은행들과 대비된다. 국내 은행은 대출금리를 시장금리에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이자이익을 취하면서 차주에게 금리부담을 떠넘기는데, 향후 신용위험 확대로 이어져 고객을 파산으로 이끌 수 있다. 반면 실리콘밸리은행은 스타트업 지원 과정에서 발생한 잉여자금으로 구입한 장기채 가격이 금리상승으로 인해 하락하면서 유동성 문제가 생겼다. 금융경력이 일천한 스타트업에 중개 역할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위험을 은행 주주들이 떠안은 셈이다. 어느 쪽이 고객중시 경영일까.
셋째, 실리콘밸리은행의 흥망을 지켜보며 주목할 점은 이 은행의 초기 성공은 고객에 대한 남다른 관계금융 서비스 제공이 이끌었고, 말기의 실패는 겸영이 허용한 장기채 보유가 원인이었다. 이에 비춰 디지털전환 경제에서 전통적 대출 방식만으로는 스타트업 등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어렵다는 국내 일반은행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비이자수익을 대하는 금융사들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렵다. 고객요구 충족을 위한 서비스 제공에서 비이자수익이 창출되는 게 아니라, 비이자수익 확대를 위해 펀드와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모습이다.
넷째, 미국 정부가 실리콘밸리은행의 예금 전액 지급보장을 선언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역은행의 스타트업 생태계 지원 역할이 고려됐을지 모르지만, 예금보장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예금 지급보증 한도(5천만원) 증액 논의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한도 증액은 금융활동 결과에 대한 예금자의 불안감 해소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바로 이 때문에 금융사의 위험부담행위 사전 감시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산업을 더 건전하게 만드는 대안 모색이 바람직한데, 예금보험료 차등 적용을 확대하는 차등보험료 실효성 제고 방안을 고려할 수 있겠다.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의 귀추가 주목되는데, 그간 파산 은행의 중개 역할과 위험관리 실패 사유에도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