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이 지난 3·4일 제주 남방 공해상(동중국해)에서 대잠전 훈련 등을 실시했다. 해군 제공
[한겨레 프리즘] 권혁철
통일외교팀장
옷차림의 기본은 티피오(TPO: Time, Place, Occasion)라고 한다. 때와 장소, 상황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다. 결혼식장, 장례식장에 갈 때와 운동할 때 입는 옷이 달라야 한다.
옷차림뿐만 아니라 군사훈련에서도 티피오가 중요하다. 특히 외국과 함께 하는 연합훈련(연습)은 언제 어디에서 할지 세심하게 가려야 한다. 훈련 형식도 중요한 외교·안보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북핵 위협 극복”을 강조하며 출범한 이후 한반도 부근에서 네차례 한·미·일 연합해상훈련을 했다. 그런데 최근 이 훈련들의 때와 장소가 엉망이다.
한·미·일은 지난 2월22일 독도 인근 동해에서 미사일방어훈련을 했다. 2월22일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며 일본 시마네현이 정한 ‘다케시마의 날’이다. 훈련 이튿날인 2월23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종섭 국방장관에게 “왜 다케시마의 날에 한·미·일 훈련을 독도에서 했느냐”고 물었다. 이종섭 장관은 “그 전날 계획을 했었는데 그날 준비가 덜 돼서 그 다음날로 미뤄지다 보니까 우연히 그렇게 됐었는데…”라고 답했다. 다케시마의 날 독도 인근에서 한·미·일 훈련을 우연히 하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한·미·일은 지난 3·4일엔 미 항공모함 니미츠함 등이 참가한 대잠전 훈련을 했다. 한·미·일은 이 훈련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냈는데, 훈련 장소와 목적을 설명한 대목이 서로 달랐다. 한국 국방부는 훈련 장소를 ‘제주 남방 공해상’이라고 밝혔다. 미국 해군은 동중국해(EAST CHINA SEA), 일본 해상자위대는 동중국해(東シナ海)라고 보도자료에 적었다. 제주 남방 공해상과 동중국해는 같은 곳이다.
왜 한국만 제주 남방 공해상이라고 밝혔을까. 이번 훈련이 북한이 아닌 중국을 겨냥했다는 논란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미·일이 잠수함을 탐지·파괴하는 대잠전 훈련을 벌인 곳은 제주 남쪽 320㎞ 거리인 북위 30도36분 이남 바다라고 한다.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을 다투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약 300해리(555㎞) 떨어진 곳이다. 산둥성 칭다오가 모항인 중국 북해함대와 저장성 닝보가 모항인 동해함대가 태평양으로 나오는 길목이다.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일본 남서지역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다. 일본은 대만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남서지역 방위태세를 걱정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보도자료는 “미-일 동맹의 억제력과 대처력 강화, 한·미·일 안보협력 추진을 위해 한·미·일 공동훈련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미 해군 보도자료는 “이런 훈련은 상호 운용성을 만들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이란 대중국 견제 압박을 뜻한다.
미국과 일본의 보도자료에는 ‘북한’이란 단어가 아예 없다. 이와 달리 한국이 밝힌 이번 훈련의 목표는 “북한의 고도화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수중 위협에 대한 한·미·일의 대응능력 향상”이다. 이 설명을 들으면 동·서해에 기지를 둔 북한 잠수함들이 동중국해까지 내려올 가능성은 없는데 왜 “북한 잠수함 대응” 훈련을 굳이 동중국해에서 했을까란 의문이 생긴다.
한·미·일이 대잠전 훈련 장소, 목적을 다르게 설명한 것은 각각 처한 위협과 국가이익이 다르기 때문이다. 3국이 겉으로는 한·미·일 안보협력을 한목소리로 강조하지만 한국은 북핵 위협 공동 대응, 미국과 일본은 대중국 공동 압박이 주된 관심사다. 이익을 지키려면 개인이나 국가나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를 소홀히 하면 남의 장단에 휩쓸려 춤추게 된다. 일상에서 티피오를 벗어난 옷차림은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사는 데 그치지만, 때와 장소를 못 가린 한·미·일 훈련은 국제정치 장기판에서 한낱 졸임을 ‘셀프 인증’하는 꼴일 수 있다.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