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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의사인 내가 간호법을 지지하는 이유

등록 2023-04-12 18:39수정 2023-04-13 18:06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간호법 제정 추진 범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는 대한간호협회 간호사들이 간호법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문화마당에서 팻말을 들고 거리 선전전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간호법 제정 추진 범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는 대한간호협회 간호사들이 간호법 국회 통과를 촉구하며 문화마당에서 팻말을 들고 거리 선전전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키 작은 중문을 지나 무릎 높이 마루를 지나 담장 옆 금강초롱을 지나 비닐하우스를 지나, 언덕 위에 있는 곳. 낮이든 밤이든, 비가 와 질퍽거려도 눈이 와 얼어붙어도, ‘후라시’(손전등)를 들고 신발을 고쳐 신고 전봇대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서야 뒷간이 있다.

최 할머니 집 뒷간은 말 그대로 집 뒤편에 있다. 그 뒷간 오고 가는 길에 넘어져 골절이라도 될까 봐 마루에서 마당 내려가는 곳에 계단을 놓아달라 행정복지센터에 부탁드렸다. 한달 만에 찾아간 할머니 집에는 떡하니 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잘됐다 생각하고 무심히 나오려는데 동행한 최 선생님(간호사)이 그런다. “어, 이건 안 돼! 계단을 10㎝는 줄여야 해!” 자세히 보니 무릎이 좋지 않은 할머니가 딛고 내려오기에는 계단이 너무 높았다. 곧장 행정복지센터에 연락해 계단 높이를 10㎝씩만 낮춰달라 다시 부탁했다.

10㎝.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높이다. 그런데도 사소한 데 목숨 걸듯 집요하게 매달리는 까닭은 노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바로 그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엉덩뼈를 산산조각 내고 손목뼈를 부서트리는 것은 낭떠러지가 아니다. 개미들도 넘어갈 수 있는 문지방에 걸려서,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벽에 붙잡을 무언가가 없어서, 넘어지고 부서지고 급기야 목숨을 잃는다. 의료인인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에 10㎝ 낮추는 일에 매달린다. 최 선생님은 그 사소한 것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왕진을 끝내고 어르신들 댁을 나올 때 가장 나중에 나오는 사람은 늘 최 선생님이다. 뒤돌아보면 항상 무언가 당부하거나 확인하고 있다. 오늘도 최 선생님은 당뇨로 시력을 잃어가는 할머니 손발톱을 깎아주고 기억력이 떨어진 할아버지가 두달 넘게 뇌경색약을 빼먹은 걸 발견해 약을 찾아 줬다. 발톱을 잘못 다듬어 생긴 염증으로 발가락을 자르는 당뇨 환자, 약을 빼먹어 재발한 뇌경색 환자를 예측해야 하는 의료진이기 때문이다.

건강은 노년기 삶의 맨 밑돌이다. 밑돌이 빠지면 윗돌들은, 그 위에 쌓아 올린 삶은 와르르 무너지기 일쑤다. 이렇듯 노인 돌봄의 핵심은 의료인데, 실제 돌봄 현장은 의료와 연계가 끊어진 채 생활지원사와 요양보호사들로만 구성돼 있다. 의료와 복지 양쪽에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 현장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판단하고 연결해주는 통합적인 전문가가 시급하다. 누가 그 역할을 할 것인가. 의사 아니면 간호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의사가 지역사회 돌봄 연결의 중심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역 돌봄에 참여하는 창구라고 할 만한 방문진료를 하는 동네의원은 0.4%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를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할 공공의료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아픈 노인에게는 집으로 찾아오는 의사가 절실하지만, 의사들은 과연 집에 올 수 있는가. 의사들이 가지 못하는 곳에 같은 의료진인 간호사들이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간호법이다. 99.6%의, 방문진료를 하지 않는 의사는 병원 안에서만 환자를 경험한다. 하지만 환자는 병원 밖에서도 환자다. 오늘도 수많은 병원 밖 환자들의 삶을 본다. 6개월 넘게 침대에 갇혀 사경을 헤매도 병원을 찾아가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귀에서 고름이 나와도 전신마비 상태여서 병원 갈 엄두를 못 내는 장애인을 만난다. 의사협회가 간호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어쩌면 병원 밖 환자들의 삶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사 맞고 안 아파서 펑펑 울었어. 이렇게 안 아플 수 있었네.” 관절통으로 안방에서 못 나오던 할머니에게 통증 주사를 놓아드린 뒤 재방문하자 할머니가 한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최 선생님이 말했다. “제가 병들고 힘들어졌을 때도 저희 같은 방문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속으로 답했다. 나도 최 선생님 같은 분이 찾아오는 마을이 있다면 그곳에서 늙어가고 싶다고. 집 안에 갇힌 수많은 환자들 마음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의사인 내가 간호법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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