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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혼종의 경관, 한강의 다른 얼굴

등록 2023-04-23 18:20수정 2023-04-24 02:35

한강변 보행 네트워크. 다른 높이에서 다른 시선으로 한강의 다른 얼굴을 직면한다. 머리 위로 올림픽대로가 지나간다. 사진 배정한
한강변 보행 네트워크. 다른 높이에서 다른 시선으로 한강의 다른 얼굴을 직면한다. 머리 위로 올림픽대로가 지나간다.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모 방송국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나보다 훨씬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 청년들과 공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서울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한강을 꼽았다. 의외였다. 기회 될 때마다 학생들 의견도 들어봤다. 마찬가지였다. 서울 최고의 공원은 단연 한강공원이란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한강변이 어느새 자전거 타기뿐 아니라 넓은 하늘 밑에서 강바람 쐬며 즐기는 ‘치맥’, ‘물멍’, 텐트 피크닉, ‘차박’이 펼쳐지는 여가 문화의 성지로 등극한 것이다.

그러나 한강은 생각처럼 낭만적인 자연이 아니다. 해마다 숙명처럼 닥치는 홍수를 통치하고 강남 개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강 양안의 제방과 그 위의 강변도로가 도시와 강을 가르는 두꺼운 장벽으로 계속 작동하고 있다. 자연성 회복을 목표로 콘크리트 호안 일부를 철거해 친수성이 나아졌고 잠실, 반포, 여의도, 양화 등지에 조성한 거점 공원들이 일상의 여가 공간으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걸어서 한강에 가려면 지난한 여정을 각오해야 한다. 공원 몇곳을 빼면 대부분의 강변에서 안전한 산책이 불가능에 가깝다.

한강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한강 르네상스’의 속편인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의 화려한 아이템이 연일 발표되고 있다. 서울시가 내건 목표는 자연과 공존하는 한강, 이동이 편리한 한강, 매력이 가득한 한강, 활력을 더하는 한강이다. 여의도 강변에 제2세종문화회관을 짓고 하늘공원 위에 초대형 관람차 ‘서울링’을 세운다. 노들섬은 예술섬으로 재변신하고 한강 공중으로 곤돌라가 다닌다. 한강, 서울의 역동적인 근현대사 못지않게 참 변화무쌍하다.

이 뒤숭숭한 뉴스에 봄기운과 미세먼지가 뒤섞인 오후, 지난해 초 완공된 ‘한강변 보행 네트워크’를 걸었다. 여의나루역에서 한강대교 남단을 거쳐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5.6㎞ 길이 수변 보행로다. 네트워크라는 이름처럼 복잡하게 엮은 그물 길이 아니라 하나의 선이다. 여의도 구간을 제외하면 넓은 둔치가 없다. 콘크리트 옹벽 위로 좁은 길이 나 있고 위태로운 길 바로 아래로 강물이 흐른다. 구간의 반가량인 올림픽대로 노량대교 하부에선 하늘을 볼 수 없다.

좁고 어둡고 위험한 환경에 거대한 교각들과 자전거 행렬까지 뒤엉키는 곳. 이 난감한 보행환경을 전략적으로 개선하고 몇군데 거점에 정제된 디자인의 쉼터를 마련한 게 ‘한강변 보행 네트워크’다. 설계를 총괄한 조경가 최영준(서울대 교수)의 말을 들어봤다. “환경 조건은 최악이었지만 한강변의 진짜 모습을 가까이 직면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현실의 한강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거닐 수 있도록, 그리고 인공 인프라 틈새로 강의 생명력과 생명체가 틈입할 여지를 열어보려 했어요.”

올림픽대로를 타고 운전하면 10분이 안걸리는 구간을 두시간 동안 걸으며 한강을 새롭게 만났다. 강변도로 높이에서 자동차의 속도로 이동하며 경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몸을 덮쳐 왔다. 지형의 높낮이를 발로 지각하며 다른 시선과 앵글로 한강의 다른 얼굴을 직면했다. “평생 알고 지낸 친구의 얼굴을 못보다가 드디어 본 느낌이야.”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평생 습지에 고립돼 살아가던 소녀 카야가 전망탑에 올라가 그 습지를 처음 내려다보며 내뱉는 대사다. 꼭 그 느낌이었다. 익숙한 경관을 처음 만나는 느낌.

올림픽대로 밑을 걷는 구간이 이 길의 하이라이트였다. 내 머리 위로 도대체 몇대의 자동차가 지나갔을까. 육중한 교각들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이곳이 고속화도로 하부라는 사실을 잊는다. 이질적이고 생경하지만 동시에 경이로운 경관이 펼쳐진다. 걷는 방향 왼쪽으로는 다리와 교각이 만들어낸 액자에 한강과 강북 강변이 담기고, 오른쪽으로는 도시와 강을 나누는 높은 벽이 따라온다. 교각의 배관용 구멍들은 새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다. 강을 막는 수직 옹벽에 퇴적된 모래펄은 새들의 공원이고, 강물이 실어나른 잡석더미는 새들의 놀이터다. 인공구조물의 작은 틈새로 날아든 이름 모를 풀들은 계속 영토를 늘려간다.

과학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한강변은 제방을 쌓고 도로를 내고 공원을 배치해 강을 길들이려는 인간 행위자, 그리고 그런 통치를 벗어난 자연과 사물의 행위성이 얽힌 혼종의 경관이다. 우리 뜻대로 길들일 수 있는 낭만의 자연이 아니다. 여의나루역과 동작역 사이 좁은 수변에서 만나는 한강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한강일지도 모르겠다.

혼종의 경관. 교각의 배관용 구멍은 새들의 아파트다. 사진 배정한
혼종의 경관. 교각의 배관용 구멍은 새들의 아파트다. 사진 배정한

인공구조물의 틈새로 날아든 이름 모를 풀들이 계속 영토를 늘려간다. 사진 최영준
인공구조물의 틈새로 날아든 이름 모를 풀들이 계속 영토를 늘려간다. 사진 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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