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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원자폭탄과 강제징용, 위로와 봉인 사이

등록 2023-05-22 18:48수정 2023-05-23 02:39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이주현 | 뉴스총괄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다카하타 이사오가 연출한 <반딧불이의 묘>(1988)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부모를 잃은 세이타 세쓰코, 두 오누이가 피난 생활을 하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아이들 눈에 비친 전쟁의 참상을 가감 없이 묘사해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반전영화의 고전’ 반열에 올랐지만,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한 아시아의 몇몇 나라들은 이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정말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데 다 보고 나면 이데올로기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꼽으며 “일본을 전쟁의 피해국가인 것처럼 둔갑시킨다”고 했다. 이런 논란 때문에 이 영화는 매번 국내 개봉이 좌초되다 26년이 지난 2014년에야 한국 영화관에 걸렸다.

“세계 평화를 바라는 관점”에선 걸작으로 평가받았음에도, 36년 동안 가혹한 식민지배에 시달린 한국에선 전쟁의 책임을 방기하는 영화로 인식되는 것이 한-일 관계의 딜레마다. 2006년 회고전이 열렸을 때 방한한 다카하타 이사오는 “중국이나 한국에 대해 일본이 행했던 것은 잘못됐지만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히 일본이 피해자”라면서도 “그렇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 한국인이 좋지 않게 보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수긍했다. 지구상 유일한 피폭 국가로 ‘피해자성’을 주장하는 일본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갈등은 그만큼 복잡한 한-일 관계의 맥락을 드러낸다.

이틀 전인 21일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해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이후엔 주요 7개국(G7) 회의 참관국 정상들과 함께 평화기념공원 내 원폭자료관을 둘러보고 위령탑에 헌화했다. 한·일 양국 정상이 함께 한국인 피해자를 기리는 위령비를 참배한 것은 처음이며, 한국 현직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찾은 것 자체도 처음이다. 특히 윤 대통령이 히로시마 거주 원폭 피해자들과의 만남에서 “슬픔과 고통을 겪는 현장에서 고국이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깊은 사과를 드린다”고 했을 때 눈물을 훔치는 재일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애잔함이 밀려왔다. 위령비에 적힌 대로 “공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구중을 헤매”던 피해자 2만명의 영혼은 대통령의 사과에 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마른땅’에서 위령의 첫걸음을 내디딘 게 아니다. 윤 대통령에게야 이번 방일은 진창과도 같았던 두 나라의 우호 관계를 굳히는 자리였겠지만, 실제로 그가 서 있는 곳은 역사의 뻘밭이다. 가해자 일본의 책임을 직접 묻겠다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한은 풀리지 않았고, 앞으로 풀어야 할 과거사 문제도 적지 않다. 기시다 총리의 “가슴 아프다” 발언은 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될 수 없다. 당사자가 생존해 있는 한, 사과는 이들을 향해야 한다.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가운데는 강제징용 피해자도 포함돼 있다”는 대통령실의 해명은 일본의 직접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피해자들에겐 위로가 될 수 없다. 원폭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한 동시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봉인해버렸다는 시선도 엄존하는 게 현실이다.

2016년 원폭 투하국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방문을 예고하자 일본 정부는 오바마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사전에 입장을 정리했다. 과거사 문제에서 우익 성향을 보여온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사죄를 요구하지 않고 말없이 손님을 맞는 것이 큰소리로 사죄를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품위 있다는 인상을 준다”며 국가의 격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전범국인 일본이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것과 ‘이중의 피해’를 입은 한국이 ‘100년 전 일이니 접고 가자’고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사죄를 요구하지 않을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도 남는다. 오바마의 방일 이듬해 외교관 조세영은 이렇게 썼다. “설사 미국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하더라도 그런 결정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아니라 직접 피해를 본 개인들이 아닐까.”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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