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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처 상투적 보고에 노 전 대통령, “생산적 대안 내라” 질타

등록 2023-05-29 16:59수정 2023-05-30 02:33

[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17화 저기압 업무보고

2003년 3월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농림부 업무보고에서 김영진 농림부 장관이 간부소개 및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3년 3월1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농림부 업무보고에서 김영진 농림부 장관이 간부소개 및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주 노동부, 행정자치부, 감사원 업무보고 이야기를 했다. 대체로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부처 업무보고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의 질책이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3월14일(금) 오전 10시 농림부 업무보고가 그랬다. 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모두발언을 했다. “쌀과 우유의 과잉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 정책의 실기 탓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이 세계 대세이므로 장차 중국, 일본까지 염두에 두고 미리 연구를 해둬야 한다. 농외소득을 올릴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어 인수위원으로 일했고 농업티에프(TF) 간사를 맡은 농촌경제연구원 정명채 박사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다국적농기업들이 세계 지배 전략으로 각국의 농업 유통망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중이므로 대응이 시급하다. 협동조합 조직이 외부 공격에 방어력이 높으니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캐나다의 곡물협동조합이나 유럽의 협동조합이 좋은 사례다. 이에 비해 한국의 농협은 신용사업 중심이고 경제사업이 약해 방어태세가 안 되어 있다. 농협의 방향 전환이 시급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쌀 수매가 문제를 거론했다. 농민들은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고 정부는 예산을 절약하려다 보니 매년 수매가 전쟁이 반복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수매가를 2% 인하하되 직불보조금 800억원을 지불하는 것이 농민들에게 유리하지 않으냐고 제안했다. 기획예산처는 쌀 수매가가 일본은 21% 인하, 대만은 동결인데 한국은 26% 인상이어서 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밀어붙여 농민들을 결국 수렁에 빠뜨렸다”고 농림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수매가 인하를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 공직자들이 자세를 바로잡고 생산적 대안을 개발해야 한다.”

당시 김영진 농림부 장관은 여러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농가 자금대출을 2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에서 3년 거치 7년 분할 상환으로 바꿔달라, 2% 인하가 예정된 추곡 수매가를 동결해달라, 그러면서 그 대가인 보조금 800억원도 유지해달라, 농가부채를 탕감해달라 등 온갖 요구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런 농림부의 무리한 요구를 비판한 것이었다.

정세균 의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농업구조 개선사업에 42조원, 그리고 농특세 15조원이 투입되다 보니 과잉생산으로 치달았고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국회도 농민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고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봉수 농업특보는 양특(양곡관리특별회계) 적자가 과연 농민을 위한 것인지 질문하면서 농림부의 고질적인 인사 편중을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추곡 수매제도를 언제까지 끌고 갈 건지 근본적 질문을 던지면서 미래를 내다볼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쌀 재고는 1200만석으로 적정량보다 6백만석 초과였고, 이로 인해 초과 재고 유지비로만 한해 2700억원을 쓰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질책해 미안하다면서도 어쨌든 과거 방식을 계속 끌고 가서는 안 되고 정책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업에 10년간 80조원을 쏟아부었는데 문제 해결은커녕 상황은 악화해가고 있으니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 달라고 주문했다.

실제 당시 농가소득 중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은 15%였는데 한국은 50%에 달했다.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일본은 5%에 불과했지만 한국은 25%로 한국 농가는 쌀 의존도가 너무 높았다. 한국 농가가 특별히 정부보조를 많이 받지도 않았다. 한국 농가소득 중 정부보조 비중은 10%로 미국(30%)이나 유럽(36%)보다 낮은 편이었다. 노령화로 농가 인구가 줄어들면서 2003년 기준 농가 평균 경작면적은 1.3정보(1정보=3천평, 9917㎡)로 과거보다 넓어졌지만 선진국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유럽의 농가 인구는 1958년 1700만명에서 2000년 4백만명으로 감소했는데, 같은 기간 평균 경작면적은 7정보에서 30정보로 넓어졌다. 농가당 30정보면 윤택한 생활이 보장되지만 1정보 남짓 되는 경지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잘 살기 어렵다.

어쨌든 과거 농업정책이 추곡수매가 인상이라는 고식적 대책에 장기간 의지해왔고, 이는 생산 증가와 가격하락으로 이어졌다. 앞뒤 모순되는 정책을 관성적으로 반복해온 결과 맞닥뜨린 자가당착이고 진퇴양난이었다. 대통령이 농림부 보고에 답답해하고 질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농업정책은 종래의 모순적 가격지지 정책과 결별하고 논농업 직불제, 쌀 소득보전제 등 시장친화적 정책으로 방향을 바꿔 지속가능한 농정의 단초를 제공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4월10일 오전 청와대에서 한준호 위원장으로부터 중소기업특별위원회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땜질식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4월10일 오전 청와대에서 한준호 위원장으로부터 중소기업특별위원회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땜질식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청와대사진기자단

4월10일(목) 10시 중소기업특위와 중소기업청 업무보고가 있었다. 다른 부처 업무보고와 마찬가지로 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모두발언을 했다. 특히 1997년 이후 한국 기업들이 중국, 동남아로 빠져나가는 소위 산업공동화 우려와 산업인력 구인난 문제를 언급하면서, 중기특위 5년간 활동이 미미하니 중소기업청과 통합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인수위원으로 활동했던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준경 박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은 중소기업에 과연 얼마나 경제적 효과가 있었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노 대통령은 중소기업중앙회가 왜 고용허가제 도입에 반대하나? 정부가 협의한 적 있느냐? 없다면 직무유기가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중소기업 지원 예산이 1년에 5.5조원이나 되는데 금융지원에 4.4조원 나가고, 신보(신용보증기금)와 기보(기술보증기금) 출연 및 조세감면에 6400억원, 이차 보전에 1500억원이 나가고 있다. 더 이상 이런 식의 요소 투입 증대형 지원정책은 곤란하고 기술혁신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고령 농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쓰는 중소기업이나 연명 원리로 연명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농민이나 중소기업이나 정치적 압력을 가해 무조건 지원받던 옛날 방식은 이제 한계에 왔다. 정책금융이 중소기업 지원의 핵심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대덕연구단지 등을 이용해서 기술개발을 위한 지원을 해줘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3월14일 오전 청와대에서 농림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으며 보고내용을 꼼꼼히 메모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3월14일 오전 청와대에서 농림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으며 보고내용을 꼼꼼히 메모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 대통령은 틀에 박힌 형식적 보고, 상투적 보고를 매우 싫어했다. 고용허가제, 중소기업 지원 등 상투적인 방식의 보고에 대통령의 비판이 이어지면서 회의장 분위기가 저기압이 됐다. 다행히 회의 끝머리에 어느 국장과 장하진(뒤에 여성부 장관) 중기특위 위원, 장흥순 벤처협회장의 발언으로 분위기가 나아졌다. 특히 장 회장은 벤처 생태계 양성을 강조하면서 “벤처가 죽어야 벤처가 산다”는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그가 지방대와 지방산업이 결합하면 비전이 있다고 말하자 노 대통령이 기뻐하면서 갑자기 옆에 앉은 나를 향해 “이 실장, 된다고 하니 열심히 해봅시다” 라고 해서 얼떨결에 “예 그렇게 하입시더” 라고 대답했다.

농림부와 중소기업청·중기특위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고민은 비슷했다. 오랜 타성적 정책을 버리고 농민, 중소기업이라는 경제적 약자를 도울 근본적 방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약자에게 당장에 돈 쥐여준다고 능사가 아니다. 그들의 자생력을 길러줄 시장친화적 정책을 써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여기에 노 대통령의 깊은 고민이 있었다.

<strong>필자 이정우: 1</strong>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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