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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등록 2023-06-18 18:19수정 2023-06-19 02:35

미국 시애틀 가스워크 파크. 쓸모없는 시간을 허락하는 공원에서 마음을 내려놓았다. 사진 배정한
미국 시애틀 가스워크 파크. 쓸모없는 시간을 허락하는 공원에서 마음을 내려놓았다. 사진 배정한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어느 여름, 이 주제의 원고 청탁을 받고 숨이 턱 막혔다. 조경과 도시를 공부하고 가르치며 쓴 글과 책의 소재 대부분이 공원이고 크고 작은 공원의 계획과 설계에도 참여해왔지만, 막상 나의 공원이 어디인지 선뜻 답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의 공원은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제목은 나만의 공원을 발견하고 나의 신체로 공원과 교감하고 싶은 열망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연구년을 맞아 미국 시애틀에서 네 계절을 보내며 나는 비로소 머리가 아닌 몸의 감각으로 공원을 만나게 됐다. 모처럼 맞은 충전의 시간을 보낼 도시로 시애틀을 떠올린 건 멕 라이언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탕웨이의 <만추>에서 본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와 몽환적인 풍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이피에이(IPA) 열풍을 선도하는 수제 맥주의 대표 도시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시애틀행을 결심하게 한 가장 큰 동기는 가스워크 파크(Gas Works Park)의 존재였다.

조경가 리처드 하그가 설계한 가스워크 파크는 시애틀 유니언 호숫가의 석유 정제 공장 건물과 터를 되살려 만든 공원으로, 요즘 유행하는 산업시설 재생 공원(post-industrial park)의 원조다. 나는 대안적 환경미학을 다룬 논문에서 참여의 미적 경험을 예증하는 장소로 이 공원을 다룬 적이 있다. “가스워크 파크는 천혜의 환경 조건과 폐허가 된 공장의 자취를 결합시켜 부지의 역사를 가감 없이 노출함으로써 순결한 자연에 대한 환상과 인간 중심적 문화에 대한 신화 모두를 극복한다.” 무려, 이런 말까지 쏟아냈다. 문제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 이런 평가를 했다는 점. 고백하자면 늘 가스워크 파크에 빚진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낯선 도시의 낯선 공원에 마음을 열자 나의 일상 속으로 공원이 들어왔다. 사진은 미국 시애틀 가스워크 파크. 사진 배정한
낯선 도시의 낯선 공원에 마음을 열자 나의 일상 속으로 공원이 들어왔다. 사진은 미국 시애틀 가스워크 파크. 사진 배정한

낯선 도시에 짐을 푼 다음 날, 떨리는 마음을 쓸어내리며 가스워크 파크로 향했다. 섬세한 경사와 각도로 설계된 동선을 따라 산책하며 맞은 겨울비에 오래된 부채감이 씻겨 내려갔다. 공원 안에 남긴 공장 건물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참여의 환경미학이라는 이론적 해석도 필요 없었다. 사람이 아닌 장소에도 첫눈에 반할 수 있다니, 그것도 평범한 공원에. 시애틀의 겨울은 거의 매일 비가 내리는 우기이지만, 공원에 두 번째 간 날은 청명한 하늘이 나를 반겼다. 연날리기 명소로 이름난 언덕 정상에 몸을 맡기고 누웠다. 공간에 마음을 내려놓는 첫 경험. 곧 짙은 노을이 나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높고 푸른 하늘은 보라에서 진홍을 거쳐 다시 주황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가스워크 파크와 만났다. 어느 날은 공원을 한 바퀴 산책하며 하루를 시작했고 또 어느 날은 해넘이 공연이 펼쳐지는 공원에서 일과를 마쳤다. 공원에 마음을 열자 잠시 거쳐 갈 이방의 도시가 점점 친숙해졌다. 부드럽게 굴곡진 지형의 공원 언덕에 오르면 유니언 호수를 떠다니는 요트, 호수에 뜨고 내리는 수상 비행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나오는 수상 가옥들, 도시의 역동적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잡힌다. 나는 가스워크 파크에서 한가한 해찰과 ‘공원멍’을 즐기는 시애틀 시민 중 한 명이 되어갔다. 공원 외곽 후미진 곳에 깊이 밴 역한 마리화나 냄새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감각적 경험. 쓸모없는 시간을 허락하는 공간. 소용과 효용의 강박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쾌감.

가스워크 파크의 절친이 된 뒤로 친한 공원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공원 설계의 선구자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가 설계한 볼런티어 파크, 해안 공원인 동시에 하나의 현대 미술 작품이자 도시 구조 개선의 매개체이기도 한 올림픽 조각공원 같은 유명한 공원뿐 아니라 크고 작은 동네 공원들도 한곳씩 순례하기 시작했다. 지도 앱에 저장해놓은 기록을 다시 보니 1년간 시애틀 인근에서 가본 공원이 쉰 곳을 넘는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던 공원 벤치에 앉아 브런치 먹기, 책 읽기, 음악 듣기 같은 사치를 처음 누려봤다. 급할 때는 서울의 프로젝트, 논문 교정, 잡지 편집회의도 공원에서 우아하게 온라인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나는 낯선 도시의 낯선 공원들에서 공원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나의 일상 속으로 공원이 들어왔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공원을 걷고 공원에 앉는 시간이 늘었다. 같은 공원이 달리 보였다.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다시 이 질문을 받는다면 이제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짙은 노을이 몸으로 달려든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동한다. 사진은 미국 시애틀 가스워크 파크. 사진 배정한
짙은 노을이 몸으로 달려든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동한다. 사진은 미국 시애틀 가스워크 파크. 사진 배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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