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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잠시 몸을 피한 동굴이 학살터가 됐다

등록 2023-06-27 18:35수정 2023-06-28 02:37

제노사이드의 기억 제주 _04
햇볕이 들지 않은 숲 속 그늘이었지만 굴 입구를 막아놓은 쇠창살은 녹슬지 않은 채 제 빛을 내고 있었다. 차가운 회색 톤의 창살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제한적이나마 최대한 도틀굴의 모양과 분위기를 사진에 담기 위해 뷰파인더로 굴 입구를 바라보면서 창살이 최대한 반짝거리는 각도와 앵글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2017년 11월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도틀굴을 처음 찾았을 때, 나를 밀어내려는 강한 ‘기운’을 밀쳐내며 사진기를 앞세우고 한발짝씩 겨우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었다. 굴 입구는 수직 형태였는데 쇠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도틀굴 주변은 어두워서 사진기의 조리개를 열고 저속 셔터로 빛 노출을 늘려야 했는데 그 ‘기운’과 마주하며 용을 쓰다 보니 숨이 가빴고 팔이 부르르 떨려 한참을 그냥 서 있어야 했다. 사진은 지난 3월16일 찍은 모습이다. 김봉규 선임기자
2017년 11월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도틀굴을 처음 찾았을 때, 나를 밀어내려는 강한 ‘기운’을 밀쳐내며 사진기를 앞세우고 한발짝씩 겨우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었다. 굴 입구는 수직 형태였는데 쇠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도틀굴 주변은 어두워서 사진기의 조리개를 열고 저속 셔터로 빛 노출을 늘려야 했는데 그 ‘기운’과 마주하며 용을 쓰다 보니 숨이 가빴고 팔이 부르르 떨려 한참을 그냥 서 있어야 했다. 사진은 지난 3월16일 찍은 모습이다. 김봉규 선임기자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4·3 당시 중산간 지역인 선흘리 주민들이 은신했다가 학살당한 도틀굴의 지번이다. 소개령이 내려지자 일부 주민들은 함덕이나 조천 등 해안마을로 내려갔지만 상당수는 선흘곶(‘곶’은 제주어로 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 도틀굴과 인근 목시물굴, 벤벵듸굴, 대섭이굴에 분산해 숨었다. 소와 말 등 가축들과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멀리 떠날 수 없기도 했다. 주민들은 잠시 피신한다며 집에서 멀지 않은 동굴을 찾았지만, 그 결말은 처참했다.

숨어 지낸 지 나흘째 되던 1948년 11월25일, 도틀굴이 토벌군에 발각됐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주민들은 바로 총살됐다. 이곳에서 형 고원석을 잃은 고춘석(2003년 당시 71세)씨는 “분산해 숨어야 어느 한쪽이라도 산다고 해서 나는 목시물굴, 형님은 인근 도틀굴에 숨었지만, 형님은 도틀굴에서 죽었다”고 증언했다. 목시물굴에 숨었다가 군인들이 들이닥치자 숲 속으로 도망쳐 살아났던 김형조(2003년 당시 82세)씨는 “나중에 돌아와 보니 도틀굴과 목시물굴 주변에 시신이 널려 있었어, 시신의 반 이상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그을려 있었어, 기름을 붓고 불태운 거야”라고 증언했다.(<제주4·3유적 제주시편> 615쪽) 선흘리 주민 220여명이 이렇게 희생됐다.

4·3 당시 도틀굴 부근은 인적 드문 깊은 숲이었지만, 요즘은 제주 4대 곶자왈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데다 숲 탐방로까지 만들어져 많은 사람이 찾는다. 2019년 5월 건립된 선흘리 4·3희생자위령비에서 걸어보니 도틀굴까지 200걸음이 채 안됐다. 수직으로 내려가는 굴 입구는 쇠파이프 창살로 출입을 막아놓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갑갑했다. 이곳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원혼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을 것 같아서였을까? 혼백이 쇠창살에 구애받을 리야 없겠지만….

햇볕이 들지 않은 숲 속 그늘이었지만 굴 입구를 막아놓은 쇠창살은 녹슬지 않은 채 제 빛을 내고 있었다. 차가운 회색 톤의 창살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제한적이나마 최대한 도틀굴의 모양과 분위기를 사진에 담기 위해 뷰파인더로 굴 입구를 바라보면서 창살이 최대한 반짝거리는 각도와 앵글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2017년 11월27일 도틀굴에 처음 찾았을 때 경험한 이상한 ‘기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오후 3시께였는데 큰 길가에서 도틀굴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발을 한발짝도 내딛기 어려웠다.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뭔가가 계속 가로막고 밀어냈다. 태풍취재 때 마주했던 강한 바람처럼 말이다.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도 그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말로 ‘제발 앞으로 나가자’를 연거푸 외쳤다. 3~4분이면 가 닿을 거리를 15분쯤 고투 끝에 이동할 수 있었다. 지난 17여년 동안 수많은 학살터를 다녔지만, 그런 기운을 느낀 곳은 나치 시절 유럽 최대 절멸 수용소였던 폴란드의 트레블린카 학살터와 이곳 제주 도틀굴 딱 두 곳이다.

그날 나를 밀쳐내려고 했던 그 강한 기운은 도대체 뭐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슴에 품고 살다 이해경 만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일반적으로 귀신에 씌었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으로, 영혼들을 접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놨다. “도틀굴에서 희생당한 영혼들이 오히려 당신을 걱정한 것 같다. 학살터를 헤매고 다니면서 밀고 들어오는 나를 향해, 여기는 올 곳이 아니다, 돌아서 나가! 우리가 있을 자리에 네가 뭐하러 왔어, 라면서.”

이후 그 ‘기운’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학살터에 조심히 다니라는 영혼들 충고의 기운을 밀쳐내면서까지 사진기를 앞세웠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됐다. 지난 17여년 여러 학살터를 찾아다녔지만 큰 탈이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 영령들이 돌봐주셨기 때문은 아닐까.

어디 제주 도틀굴에서만 억울하게 희생당한 원혼들이 있었겠는가. <제주4·3사건 추가진상보고서>(2019년)는 4·3 당시 165개 피해 마을 가운데 한 장소에서 50명 이상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집단 학살터가 26곳에 이른다고 밝혔다. 성산 일출봉 부근 터진목, 정방폭포, 옥빛의 바다 함덕과 표선 앞바다가 일상적 학살터였다. 처참하게 희생당한 한 맺힌 이들의 절규가 어찌 지나간 옛일일 뿐이겠는가. 삼가 고개 숙여 그들의 안식을 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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