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기념행사에서 강석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의 소개에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지난 6월16일 타계한 대니얼 엘즈버그는 미군이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사람이다.
국방부 소속 군사 분석 전문가였던 엘즈버그는 1969년 ‘펜타곤 페이퍼’를 복사해, 언론에 넘겼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근거로 미군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군 어뢰정의 통킹만 2차 공격이, 미국의 베트남전 본격 개입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1971년 보도했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선언했다. 이라크가 대량파괴무기를 만든다는 첩보를 근거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2주 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했지만, 대량파괴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첩보는 거짓이었다.
강대국의 이익이 곧 규범인 국제무대에서 잘못된 첩보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조작해서 전쟁의 명분으로 삼은 역사적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전세계의 독재자들은 언제나 외침을 막고 범죄를 척결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필리핀 두테르테, 튀르키예 에르도안,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은 ‘강한 남자’들이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공포와 분노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했다.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내려보낸 간첩’이나 ‘체제 전복 불순 세력’으로 몰았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그랬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2021년 6월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였다.
“이 정권이 저지른 무도한 행태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습니다.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 의식과 윤리 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카르텔은 본래 ‘공급자 담합’을 뜻하는 경제학 용어다. 지금은 범죄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쓴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갑자기 ‘이권 카르텔’을 들고 나왔을까? 평생 검사를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에 나서려니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이권 카르텔’은 도대체 뭘까?
“오랜 세월 집권해 이권을 나눠 먹은 카르텔 기득권 세력을 박살 내겠다. 정권 전체가 공범이다.”(2022년 2월16일, 충주 유세)
“어려운 분을 돕는 복지에 쓰여야 할 혈세가 이권 카르텔에 쓰여 개탄스럽다.”(2022년 9월15일 출근길 약식회견,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사업 보조금 부당 집행에 대해)
“국민 혈세가 그들만의 이권 카르텔에 쓰인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이를 알고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2022년 12월27일 국무회의, 시민단체 국고보조금 지원에 대해)
“과거의 낡은 이념에 기반한 정책, 기득권 카르텔의 부당한 지대 추구를 방치하고서는 한 치 앞의 미래도 꿈꿀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국민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득권 이권 카르텔을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한다.”(2023년 3월8일 국민의힘 전당대회 축사)
“3대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도, 미뤄서도 안 된다. 개혁은 언제나 이권 카르텔의 저항에 직면하지만, 국민의 이익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2023년 5월16일 국무회의)
“강력한 이권 카르텔의 증거로 오늘 경질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2023년 6월16일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교육부 대학입시 담당 국장 대기 발령에 대해)
민주당 정권, 태양광, 시민단체, 화물연대, 건설노조, 민주노총, 좌파 정책, 교육 정책 등 나쁜 것, 잘못된 것은 모두 다 이권 카르텔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악당’으로 점지하는 사람들, ‘윤석열표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을 차례차례 이권 카르텔로 낙인찍는 것 같다. 연극에 비유하자면 이권 카르텔은 검사 출신 대통령을 빛나게 하려고 그때그때 무대에 올라가는 악역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이권 카르텔이 윤석열 대통령을 만든 것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다. 다음 차례는 또 누구일까? 언제까지 이렇게 해괴한 굿판을 지켜봐야 할까? 궁금하다.
그런데도 이른바 보수 신문의 논객들과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이권 카르텔 굿판에 장단을 맞추며 비극을 희극으로 만들고 있다. 서글프다.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