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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난민을 환대한 경험

등록 2023-07-04 18:41수정 2023-07-05 02:08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아파트 테라스에 걸려 있는 우크라이나 국기. 장영욱 제공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아파트 테라스에 걸려 있는 우크라이나 국기. 장영욱 제공

[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지난주 폴란드에 다녀왔다. 유럽이 난민 유입을 어떻게 다뤄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우크라이나인 수백만명이 피란길에 나섰다. 전쟁이 나고 16개월이 지난 지금도 유럽에 약 400만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남아 있으며, 그중 100만명가량이 폴란드에 거주 중이다. 관련 보고서를 쓰면서 출장 갈 기회가 생겨 폴란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구자와 활동가들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폴란드의 전사회적 수용이 인상 깊었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연합 회원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임시거주증을 발급해주었다. 난민들은 체육관과 쇼핑몰을 개조해 만든 거주 공간에서 지내면서, 의료, 교육, 돌봄 등 기본적인 공공서비스에 더해 일할 수 있는 권리까지 받았다.

단 몇주 만에 몰려온 수백만명의 난민을 정부 홀로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폴란드 시민들이 가세했다. 수많은 폴란드인이 구호품을 차에 싣고 국경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중 상당수는 자기 집을 열어 난민들을 재워주기도 했다. 집을 찾는 난민과 집을 제공하고 싶은 폴란드인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결됐다. 통계에 따르면 폴란드인의 85%가 어떤 방식으로든 난민을 도운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 내가 만난 폴란드인 여럿이 난민을 초대한 경험을 나눠주었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지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대학은 기숙사 하나를 따로 떼서 난민 숙소로 운영하고, 난민들에게 등록금을 감면해주며 언어 코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모금하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관공서의 폴란드 국기 곁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같이 걸려 있고, 일반 아파트에서도 난민에 대한 환영의 의미로 우크라이나기를 내건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난민에게 숙소로 제공된 폴란드 루블린 마리퀴리대학의 한 기숙사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장영욱 제공
난민에게 숙소로 제공된 폴란드 루블린 마리퀴리대학의 한 기숙사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장영욱 제공

폴란드가 원래부터 난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사실 그 반대에 가깝다. 이라크, 시리아, 예멘 등에서 온 이민자, 난민들이 폴란드를 통해 유럽연합 땅을 밟으려 시도했지만 폴란드 정부는 강경했다. 벨라루스-폴란드 접경 지역에서 난민과 경찰 사이 충돌이 잦아 종종 사상자도 발생했다. 지난해 7월, 폴란드는 중동 출신 난민을 막기 위해 벨라루스 국경에 5.5m 높이의 장벽을 세웠다. 최근 5년간 폴란드의 난민 인정률은 6% 내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3%)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난민에게는 태도가 달랐다. 지근거리에서 발생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외면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폴란드의 손익계산서상에도 난민 수용이 유리했을 것이다. 고질적인 저출생, 고령화에 더해, 유럽연합 가입 후 서유럽으로 인재 유출이 이어져 노동 공급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우크라이나인은 언어적, 문화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전쟁 전부터 폴란드의 운송, 건설, 제조 등 주요 부문에서 일하고 있어 거부감이 덜했다. 참전을 위해 돌아간 우크라이나 노동자의 자리를 난민을 통해 채워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폴란드 처지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긴 전략적 선택이었을 공산이 크다.

난민에 대한 환대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포화 상태였던 공공서비스가 난민 수용으로 더 부족해졌고, 대규모 난민 유입이 물가와 임대료 상승에 영향을 끼쳐 내국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난민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느니, 자국민에게 쓸 돈도 없는데 난민에게 세금이 낭비된다느니 하는 근거가 빈약한, 하지만 호소력은 강한 정치적 수사가 힘을 얻고 있다. 그 영향인지 최근 설문조사에서는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지지 의향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중동, 아프리카 출신 난민에 대한 이중잣대 문제부터 체증하는 난민 수용 비용의 문제까지, 폴란드가 해결해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에 따르면, 이민 유입으로 인한 다양성 증가가 단기적으로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적 신뢰를 훼손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그 유익이 비용을 능가한다. 그는 이민자·난민을 더 잘 포용하도록 제도와 인식을 갖추는 것이 다양성의 열매를 더 빠르게 거둘 수 있는 비결이라고 지적한다. 전쟁이라는 위기를 통해 난민을 환대한 경험을 축적한 폴란드가, 당면한 과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 우리나라와 국제사회에 귀감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정문에 폴란드 국기와 함께 걸려 있는 우크라이나 국기. 장영욱 제공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정문에 폴란드 국기와 함께 걸려 있는 우크라이나 국기. 장영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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