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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부모도 아이도 교육에 응할 책임을 진다 [세상읽기]

등록 2023-07-23 18:08수정 2023-07-24 02:39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1. 유치원에서 반 친구들을 때리는 한 아이가 있다. 말려도, 타일러도, 엄하게 경고해도 소용없다. 부모님께 알려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이한테 맞은 다른 아이들 부모들이 항의해 온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때릴 때마다 담임선생님은 그 아이 손바닥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어느 날 아이 손바닥은 빨갛게 부었고 상처가 났다. 선생님은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다.

#2. 학교에서 걸핏하면 화내고 화나면 누군가를 때리는 한 아이가 있다. 타일러도 보고, 혼도 내고, 울며 호소해봤지만 그때뿐 고쳐지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은 아이를 징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부모는 어떻게든 저 습성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에 매를 들기 시작했다. 매 맞던 아이는 도망쳤고, 부모는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됐다.

#3. 한 아이가 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자기를 화나게 했다. 화내면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를 때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비난받았다. 부모도, 선생님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몇 차례 전학 다니다 자기를 받아주는 친구들을 찾았다. 친구들은 단순했다. 돈이 없으면 훔쳤고, 마음에 안 들면 때렸다. 재판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렇게 성인이 됐다. 전과가 많아 취업이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친구를 사귀고 돈을 벌어야 하는지 모른다. 자신은 착하고 쾌활하며 가족과 친구를 좋아하고, 순간적으로 실수를 할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됐다. 그는 화가 난다.

세 유형 모두 실제 재판에서 만난 사례다. 재판하면서 온통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사례에서, 그 선생님은 아이 손바닥이 빨갛게 붓도록 수차례 내리치기 전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아이 부모의 지원도, 유치원에서 인적·물적 지원도, 의료적 접근과 연계도 제공되지 않았다. 어떠한 대안도 없이 아이들을 각자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돌보고 교육하며 아이 부모의 각종 항의도 견뎌내야 했다. 혼자서. 그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요구인지 의문이다.

두번째 사례에서 부모는 더욱 심하게 고립된다. 사회성 발달과 행동 통제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의 교육과 지원을 학교가 포기하고, 달리 양육과 관련한 적절한 조력과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아이 문제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맡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를 버릴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부모는 결국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하게 된다. 그나마 책임감이 강할 때 학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점이 비극을 더 비극답게 만든다.

하지만 앞선 두 사례는 세번째 아이가 겪게 될 고립에 비하면 가벼운 것일지 모른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부모도 학교도 포기하거나 방치하며, 오로지 그를 지금 ‘이곳’에서 퇴출해 평온을 지키는 데 급급한 구조에서, 아이는 공동체에서 퇴출당하는 경험을 계속해서 쌓아가며 고립된다. 어떠한 회복적·교육적·치료적 접근도 접해보지 못했으니, 자신의 문제를 깨닫거나 고칠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 성인이 됐을 땐 이미 범죄자라는 낙인이 깊이 찍힌 상태, 그에게 이 사회는 얼마나 불합리할까. 낙인과 배제에 화가 난 스무살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불안해진다.

세 사례는 선생님이 교육을 포기하면 부모와 아이가 어떤 상황에 몰리는지, 선생님과 부모가 포기하면 아이가 어떤 상황에 몰리는지 보여준다. 결국 교육이 바로 서야 부모와 아이도 여력을 갖게 된다. 교육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교육의 범위와 내용이 명확히 재정립돼야 한다. 교육의 범위 안에서 선생님의 재량은 존중돼야 하고, 아이의 사회화와 성장을 위해 부모와 아이 자신도 교육에 응할 책임을 진다는 점이 명확히 인식돼야 한다.

무엇보다 교육의 영역에 ‘법적 조치’가 너무 쉽게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형사재판은 ‘선’을 넘은 행동을 공적으로 단죄한다. 선을 넘은 행동은 정당화되기 쉽지 않다. 결과만 보면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이 왜 선을 넘게 되었는가 들여다보면 거대한 불합리가 나타난다.

법적 조치는 교육의 한계를 명백히 일탈한 영역에서 적용돼야 하는데, 지금은 교육에 대한 의문과 불만, 의견 제시와 이의 제기가 모두 법적 조치를 예고·동반하며 이뤄지는 것 같다. 일단 법적 절차가 개시되면 그 과정에서 교육은 사라지고, 학교는 법적 분쟁의 장으로 변질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는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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