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투자한 일본 드라마 ‘더 데이스’는 매우 일본적인 방식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재현한다. 요시다 마사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소장을 비롯한 도쿄전력 및 협력사 직원들과 자위대원들의 희생정신, 서로에 대한 배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전형적인 일본인을 표상한다. 사무라이와 가미카제뿐 아니라 평범한 일본인들이 공유하는 책임의식과 충성심에 대한 칭송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핵심 정서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일본적 특징은 ‘피해자 의식’이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으로 볼 수도 있는 태도다. 일본말로 ‘히가이샤 이시키’라고 읽는 이 사고방식은 뿌리가 깊다. 태거트 머피의 역작 ‘일본의 굴레’는 일본의 정치철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의 나치 전범들과 도쿄 군사재판의 일본 전범들이 보인 태도를 비교하면서 했다는 말을 인용한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장이었던 하인리히 힘러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악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즐기기까지 하지만, 일본 전범들은 원치 않은 재난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수동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진상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 같은 수준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이 ‘더 데이스’에 실망하는 건 이런 일본적 특성 탓일 테다. 초반부의 미스터리 같은 긴장감을 예외로 하면 작품성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어쩌면 제작진이 ‘영웅적 서사의 재난 드라마’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스코프를 좁힘으로써 일부의 진실만을 말했다. 하지만 극 중 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좌절만으로도 원전의 파괴적 본성은 충분히 느껴진다.
마지막 회에 나오는 요시다 마사오 소장의 독백은 이 드라마가 끝내 성취하지 못한 어떤 지향을 드러낸다. “밝은 미래라고 불렀던 거대한 건축물은 앞으로 몇십년에 걸쳐 직면해야 하는 부끄러운 유산이 됐다. (…) 아름다운 후쿠시마의 하늘과 바다를 앞에 두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오만함이 부른 과오를 악착같이 청산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반원전 성향이 조선일보조차 이 드라마를 좋게 평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체르노빌이든 후쿠시마든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이 초래한 재난이다. 폭발의 부산물인 원전 오염수도 마찬가지다.
이재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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