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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더치페이 빌런의 혼잣말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등록 2023-08-23 19:18수정 2023-08-24 02:37

홍상수 감독의 영화엔 끝없이 술자리가 나오는데, 절대 더치페이는 안 할 것 같다. 계산은 어떤 인물이 할까? 사진은 서울 가회동 술집 ‘소설’을 배경으로 한 영화 <북촌방향> 스틸컷.
홍상수 감독의 영화엔 끝없이 술자리가 나오는데, 절대 더치페이는 안 할 것 같다. 계산은 어떤 인물이 할까? 사진은 서울 가회동 술집 ‘소설’을 배경으로 한 영화 <북촌방향> 스틸컷.

이명석 | 문화비평가

재개발로 사라졌던 동네 백반집이 새로 문을 열었다. 널찍한 단체석 대신 작은 탁자들을 들여놓아,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혼밥의 자리에 앉았다. 그때 먼저 식사한 중년 남자들이 줄줄이 카드를 꺼내며 일어섰고, 나는 오랜만에 ‘케이(K)-지갑 배틀’을 보나 싶었다. ‘내가 낼게.’ ‘아니야. 내가 쏜다니까.’ 하지만 각자 카드기를 삑삑 눌러 자율 계산을 하고 총총히 떠나갔다.

드디어 이런 시대인가? 젊은 직장인들이 키오스크에서 각자의 점심을 계산하고, 여중생들이 피자 파티를 한 뒤 휴대전화로 ‘보냈어!’ 엔(n) 분의 일 송금을 하는 건 당연지사. 이제 체면의 탑, 최상단부에 자리한 분들까지 대세에 동참하고 있다. 나는 기쁨과 착잡함이 섞인 묘한 맛의 밥을 먹었다. 왜냐하면 20~30년 전 나는 악명 높은 더치페이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는 엠티 회계를 맡자마자 선배들에게 공지했다. “참가자 절반이 여학생이고 대부분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담배는 흡연자들이 각자 사는 걸로 하죠.” 20대 후반 동호회에서는 광적으로 뒤풀이 계산에 집착하며 정산표를 만들었다. “추가 맥주와 안주는 두분이 다 드셨으니 두분 앞으로 달았습니다.” 어느 강사 모임에선 서로 계산하겠다고 다투는 두 연장자를 뚫고 내 몫만 10원 단위까지 계산하고 나와버리기도 했다.

네것 내것 없는 공동체의 시대에 나는 분위기를 깨는 악한임이 분명했다. “야야. 그냥 내가 다 낼게. 쪼잔하게.” 돌아보면 과했다 싶은 때도 있다. 내가 술 담배를 안하고 입이 짧고 소식이어서 민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은 나 같은 쫌생이 개인주의자들이 번성하는 디스토피아가 되었나?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엔(n)의 계산법은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주의자의 집게일 수도 있지만, 예측 가능, 관리 가능한 소비를 위한 최고의 도구이기도 하다. 오르는 월세 때문에 긴축재정에 들어간 친구가 톡을 받는다. “어차피 밥은 먹을 거잖아. 얼굴 보며 먹자.” 이론적으론 반박하기 어렵다. 하지만 막상 모이면 아무래도 주문이 헤퍼진다. 대식가 하나만 분위기를 주도해도 삽시간에 메뉴가 늘어난다. 건강을 위해 식단을 조절하거나 특정 음식을 못 먹는 친구들도 표정이 찌그러진다. 더치페이의 전통적 옹호자는 소수의 취향인 경우가 많다.

더치페이의 반대말론 ‘한턱’이 있다. 나도 선배나 상사 덕분에 꿈도 못 꾸던 미식을 맛보기도 했다. 그런데 뒷맛이 항상 좋지는 않았다. 식대 대납을 통해 은근히 서열을 만들고, 자기한테 잘 보여야 좋은 술, 좋은 밥을 먹는다는 암시를 주기도 했다. 비슷한 서열인 경우 계산할 때가 되면 화장실을 가거나 신발끈을 매는 눈치 게임을 벌이기도 했다. 또 한번 얻어먹었으면 다음엔 내가 내야 하는데, 최소 비슷하거나 나은 걸 사야 한다. 자연스럽게 한턱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결이 다른 경험도 있었다. 첫 직장에서 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팀별로 회식비가 나오는데 저녁 술 대신 점심 피자는 어때요?” 나는 두손 들어 반겼다. 그때는 팀장이 술을 안 즐기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상사들을 만나니 이렇게 투명한 경우가 참 귀했다. 법인카드를 무기로 직원들의 퇴근 후 생활까지 휘두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요즘 초고액 특활비와 식당 영수증 뉴스를 보면 그들 조직의 문화가 어떤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데이트는 못 그러잖아.” 요즘 한국은 물론, 일본, 싱가포르에서도 데이트 비용 지불 논쟁이 뜨겁다. 나는 연애는 물론 결혼 이후에도 더치페이가 좋다고 생각한다. 최근 커뮤니티에 상대의 식탐, 물욕, 취미 비용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부부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인생에는 그런 순간도 있다. 행복감이 흘러넘쳐 오늘은 내가 모두를 대접하고 싶은 때가. 반대로 삶의 번잡함에 지쳐 돈만 툭 던지면 누군가 알아서 모두 차려주길 바랄 때도 있다. 누군가 먼저 베풀면,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만남을 이어가고 그렇게 깊은 정을 쌓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더치페이로도 계속 잘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친한 사람들이다. 관계의 부채 없이 진짜 좋아서 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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